카메룬 출신 난민복서 이흑산 (35·압둘레이 아싼)이 지난 17일 강원도 춘천 아트복싱 체육관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하고 있다. 복싱M 웰터급 한국 챔피언인 이흑산은 오는 29일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정마루(31)를 상대로 WBA 아시아 웰터급 타이틀매치를 치른다. 사진=황진환 기자
지난 17일 오후 3시 강원도 춘천. 푹푹 쪘다. 수은주가 35도까지 치솟았다. 가마솥 더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은 피부의 한 복서가 체육관에서 연신 주먹을 뻗었다. 샌드백이 요동쳤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온몸이 땀범벅이 됐다. 훈련은 계속됐다. 그래도 복서는 허리를 꺾지 않았다. 눈빛이 형형했다.
'난민 복서' 이흑산(35·본명 압둘레이 아싼)은 오는 29일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정마루(31)와 WBA(세계복싱협회) 웰터급(한계체중 66.68kg) 아시아 타이틀전(12라운드)을 갖는다.
이흑산은 지난해 5월 복싱매니지먼트코리아(이하 복싱M) 슈퍼웰터급 한국 챔피언에 올랐다. 이후 적정체급인 웰터급으로 내렸고 고성진, 바바 가즈히로(일본), 마크 살레스(필리핀)를 연파하며 아시아 타이틀 도전권을 획득했다. 슈퍼웰터급 한국 타이틀은 반납했다.
지난 2월 WBA 웰터급 아시아 챔피언에 오른 정마루는 1차 방어전을 치른다. 이흑산의 매니저인 이경훈(춘천 아트복싱체육관) 관장은 정마루에 대해 "좋은 선수다. 훈련을 열심히 한다. 복싱 기술이 일취월장했다"고 칭찬했다.
이흑산과 이경훈 관장이 지난 17일 강원도 춘천 아트복싱 체육관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그러면서도 이 관장은 "이흑산의 KO승"을 예상했다. 이흑산의 최고 무기는 신체조건(신장 180cm·양팔 길이 187cm)이다.
이 관장은 "월등한 신체조건을 활용한 기술을 집중 연마하고 있다"며 "평소체중이 66~67kg이라서 감량이 필요없다. 경기 당일 리바운드 체중이 정마루보다 6kg 정도 덜 나갈 것 같지만 펀치파워에서 앞서기 때문에 KO승을 전망한다"고 했다.
이흑산 역시 승리를 자신한다. 자신감의 원천은 절박함이다. 이흑산은 "세계챔피언이라는 꿈을 이루려면 이번 경기에서 꼭 이겨야 한다. 복싱으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이 관장은 "이번 경기에서 지면 이흑산은 잃을 게 많다. 그만큼 긴장감이 클 수밖에 없다. 멘털트레이닝을 통해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다"고 했다.
프로전적 7전 6승(3KO) 1무. 롤모델인 무패 챔피언 메이웨더 주니어(은퇴)처럼 이흑산도 무패행진 중이다. 이 관장은 "이흑산과는 철저히 비즈니스 관계다. 앞으로 시합경험을 3~4번 더 쌓은 뒤 내년쯤 세계 타이틀전을 추진하겠다"며 "세계무대에서 경쟁하려면 기술과 협업플레이 향상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카메룬 출신 난민복서 이흑산이 지난 17일 강원도 춘천 아트복싱 체육관에서 훈련 전 핸드랩을 감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이흑산은 '난민 복서'로 유명하다.
독재자 폴 비야가 36년째 집권 중인 카메룬의 군대에서 복싱 선수로 활약했지만, 구타와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2015년 문경 세계군인체육대회 때 길태산(31·본명 에뚜빌)과 함께 망명했다. 난민 전문 이일 변호사의 도움으로 지난해 7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뒤 한국에서 프로복서로 제2 인생을 산다.
국적은 여전히 카메룬이지만 한국 영주권자이기 때문에 (피)선거권을 제외하면 대한민국 국민과 동일한 혜택을 받는다.
이흑산은 "카메룬에서는 항상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고, 미래가 불안정했다. 한국에서 자유를 얻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돼 기쁘다"고 웃었다.
다만 그는 찬반이 팽팽한 국내의 '예멘 난민 논란'에 대해서는 답변을 꺼렸다.
카메룬 출신 난민복서 이흑산이 찌난 17일 강원도 춘천 아트복싱 체육관에서 이경훈 관장과 훈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폭염이 기승을 부린 지난 17일, 이흑산이 강원도 춘천 아트복싱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이흑산에게 복싱은 살아가는 이유이자 꿈이다. 세계챔프라는 목표가 있기에 매일 고된 훈련을 감내한다. 하지만 적지 않은 나이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복싱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꺾일 때도 있다.
이 관장은 "한국 프로복싱은 5개 단체가 난립해 챔피언의 권위가 곤두박질쳤다. 한국 챔프가 됐지만 이흑산의 경기 당 파이트머니는 100만원이 채 안 된다. 생활고 탓에 몇 차례 선수생활의 기로에 서기도 했다"며 "한국 챔프도 투잡을 안 하면 먹고 살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이흑산은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체육관에서 관원을 가르쳤다. 최근 유명 모바일게임 광고를 찍은 뒤부터 복싱에 전념하지만, 고민은 여전하다. "파이트머니가 너무 적어요. 생활비도 들도 카메룬에 사는 할머니에게 병원비도 보내야 해요."
이 관장은 "이번 경기 파이트머니는 500만원이다. 아시아 챔피언이 되면 500만원 이상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흑산이 이겨야 하는 또다른 이유다.
이흑산이 지난 17일 강원도 춘천 자택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체육관 근처 언덕배기에 자리한 전세 원룸은 자신의 매니저이자 복싱스승인 이경훈 관장이 마련해줬다. 사진=황진환 기자
이흑산이 지난 17일 강원도 춘천 자택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도중 한 남성팬이 그려준 초상화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복기자
이흑산은 체육관 근처 언덕배기 전세 원룸에 산다. 단출한 세간살이 가운데 한 남성팬이 선물해준 초상화와 나란히 놓인 복싱 트로피가 눈에 띄었다.
어느덧 한국생활 3년째. 낯설기만 했던 한국 문화에도 서서히 적응하고 있다. "삼계탕, 닭갈비, 막국수 좋아해요. 이름은 모르지만 한국 요리도 직접 만들어요."
한림대 어학스쿨에서 몇 개월째 한국어도 배운다. "카메룬은 프랑스어를 써요. 영어는 독학, 한국어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아직 서툴지만 한국에서 계속 살려면 말이 통해야 하니까요."
프로복서이기 전에 30대 청년인 이흑산의 꿈은 뭘까. "복싱을 그만두면 무역업을 하고 싶어요. 좋은 아내 만나서 가정도 꾸리고 싶고요." 그와 이 관장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영화 '바보들의 행진'(가제)도 촬영 중이다.
이흑산이 조용한 춘천 거리를 성큼성큼 걷자 뭇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가 닿았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그는 한국에서 여전히 낯선 이방인이다.
그러나 이흑산은 스스로 "카메룬 코리언"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11월 바바 가즈히로와의 한일전 때처럼 이번 경기에도 태극기를 새긴 트렁크를 입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