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자료사진=노컷뉴스)
체육계 성폭력 근절을 위해 정부가 내놓은 엘리트 체육 구조의 혁신적인 개선,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KOC)의 분리 등의 대책안에 대해 체육계가 반대의 목소리를 분명히 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주 교육부, 여성가족부와 함께 체육계 성폭력 근절 대책안을 발표했다. 체육의 교육적인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소년체전을 폐지하는 등 엘리트 체육 중심의 선수 육성 방식을 사실상 폐기하고 대한체육회로부터 KOC를 분리해 만연한 성적 지상주의를 타파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이에 체육계는 31일 오전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진행된 올해 두 번째 대한체육회 이사회를 전후로 정부의 방침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분명히 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이사회를 마치고 "너무 조급하게 해서는 안된다"며 "물론 논의를 하고 개선책을 찾아야 하지만 함부로 분리하고 폐지하는 것은, 먼저 논의의 장이 만들어지면 그때 충분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보자고 정리했다"고 KOC 분리에 대한 체육회의 입장을 밝혔다.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는 "조직의 이원화"라고 답했다. 기존처럼 대한체육회가 국가대표와 국제대회 출전 업무를 관장하는 KOC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 깔려있는 대답이다.
이기흥 회장은 엘리트 체육 중심 구조의 개선안에 대해서는 "양론이 있다"며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도 많기 때문에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체육계의 입장은 정부가 내놓은 대책안을 수용하기는 어렵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사회에 앞서 대한체육회 노동조합과 경기단체연합회 노조 등도 정부의 쇄신안에 대한 우려의 뜻을 나타냈다.
대한체육회 노동조합은 "정부의 근시안적인 탁상행정에 유감을 표하며 체육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진정한 쇄신책 마련을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대한체육회 노동조합은 먼저 체육계 성폭력 사태에 대해 사과하면서 정부의 쇄신안이 "임기응변식으로 대한체육회나 종목단체 등 일부 체육 단체에 책임을 전가하는 형태의 자기 반성 없는 탁상행정"이라고 주장했다.
국제대회가 열릴 때마다 '국위선양'을 목표로 지표를 발표한 주체는 다름 아닌 정부였고 그동안 체육회가 전국 권역별 인권센터 설립, 비정규직 체육 지도자들의 처우 개선, 일반 학생들의 체육활동 확대 등을 요구할 때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정부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난과 규탄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체육계 현실에 대한 정부의 공동 책임을 명확히 하고 진정한 개선안을 도출하는데 정부가 살신성인의 자세로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전했다.
대한체육회 경기단체연합 노조 역시 최근 불거진 성폭력 사태에 대해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석고대죄하겠다"며 고개를 숙이면서도 체육인의 단합을 통해 KOC 분리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경기단체연합 노조는 "지금 체육인들의 분열을 내심 부추기는 세력이 있다. 이런 기회를 틈타 KOC를 분리, 통합 전 과거로 회귀해 100년의 역사를 가진 대한체육회를 허울로 만들려는 계획을 꾸미는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체육인 스스로 단합해 폭력과 성폭력에 희생된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쇄신책을 찾아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또 대한체육회 경기단체연합 노조는 엘리트 체육이 탁상공론에 죽어간다며 소년체전 폐지와 KOC 분리를 반대하는 대신 폭력 사태의 원인을 뿌리 뽑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처럼 정부의 대책안에 반대하는 체육계의 목소리가 보다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체육계가 먼저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쇄신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가 체육계의 고질적인 폭력과 성폭력 문제를 뿌리뽑기 위해 전면에 나선 이유 중 하나는 체육계의 자정 능력에 대한 의구심과 무관하지 않다.
조재범 전 코치의 성폭행 의혹이 불거진지 3주가 지났지만 이기흥 회장을 비롯해 어떤 체육계 인사도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체육계 역시 지금까지 탁상공론에 입각한 대책들을 내놓기만 하고 있다. 만약 체육계가 이번에 불거진 폭력 및 성폭력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 이날 수차례 언급된 공론화 과정은 "앞으로 하겠다"가 아니라 이미 시작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