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지만 고위 당정청 회의에서 일단 현행 10억원(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최근 2개월간 갑론을박이 있었던 상황에서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싶어 제가 오늘 사의 표명과 함께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이 지난 3일 오후 국회 기획재정위 전체회의에서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깜짝 고백을 하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일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몇몇 여당 의원들은 질의하다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질문도 안나왔는데 국회서 '사직서 냈다' 밝힌 홍남기, 민주당 의원들 질타국무위원이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국회에서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은 극히 드물다. 앞서 지난 4월 기재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이 결정될 때에도 홍 부총리가 책임을 지겠다며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언론 보도'를 통해 뒤늦게 새어나간 경우였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를 마친 후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당정청 간 기나긴 조율 끝에 '대주주 요건 유지'로 겨우 가닥이 잡힌 상황에서, 부총리직을 내놓을 만큼 이번 결정에 문제의식이 있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어서 민주당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처지가 됐다.
국회에서 대놓고 사의 표명을 밝히는 홍 부총리 앞에서 여당 의원들은 질타를 쏟아냈다.
민주당 기동민 의원은 "설사 결심했더라도 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 책임 있는 공직자의 태도인가"라고 되물으며 "기성 정치인의 정치적 행동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어 부적절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후덕 기획재정위원장도 "질문도 없는 상황에서 사의 표명 사실을 스스로 밝혀 위원들이 애써 준비한 정책 질의와 예산 심의를 위축시켰다"며 "위원회 권위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부처 관계자와 대화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여당 의원들의 호통에도 홍 부총리는 자세를 숙이지 않았다. 기 의원의 질타에 홍 부총리는 "저한테는 정치라는 단어가 접목될 수 없다"며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10억원으로 갑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공직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현행유지에 대해 누군가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다면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며 맞받았다.
여당 의원들이 당혹해하는 사이, 국민의힘 류성결 의원이 "책임지는 자세가 참 보기 좋다. 소신 발언을 높이 칭찬한다"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민주당 지도부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낙연 대표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제가 코멘트 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 대통령께서 최적의 판단을 하시리라 믿는다"고 말을 아꼈다. 박광온 사무총장은 사의 표명 소식에 놀라면서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는 것 같은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홍 부총리가 사직서를 제출하고, 보란 듯 이를 국회에서 공표한 것은 정책 조율 과정에서 당정간 불협화음이 상당하다는 것을 그대로 노출하는 장면이었다.
정부는 원래 계획대로 내년부터 대주주 기준을 '3억 원 이상'으로 강화한다는 계획이었지만 민주당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기재부 뜻이 관철되지 않고, 감정이 상했다고 해서 부총리라는 엄중한 직을 던지는게 말이 되느냐"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청와대 전경. (사진=연합뉴스/자료사진)
◇靑 "즉각 반려" 밝히며 사태 수습나섰지만 부총리는 "반려 몰랐다"당정 사이에 낀 청와대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홍 부총리의 사의 표명이 속보로 전해지자 청와대는 "즉각 반려했다"고 밝히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청와대 강민석 대변인은 "홍 부총리가 오늘 국무회의 직후 문재인 대통령께 사의를 표명했으나, 대통령은 바로 반려 후 재신임했다"고 출입 기자들에게 공지했다.
하지만 홍 부총리가 이어진 국회 질의 과정에서 "(사직서가) 반려된 사실을 듣지 못했다"고 답변하면서 상황이 꼬였다.
청와대가 문 대통령이 홍 부총리를 직접 만나 사직서를 반려하고 재신임했다고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이를 몰랐다고 답변하자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맞는 이상한 상황이 된 것.
이에 청와대는 홍 부총리 입장을 대리하는 듯한 추가 해명을 내놨다. 강 대변인은 "홍 부총리가 대통령과의 면담 및 반려 사실을 국회 기재위에서 밝히지 않은 것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해서"라며 "대통령의 동선이나 인사권에 관한 사안은 공직자로서 보안을 유지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밝혔다.
강 대변인은 이어 "더욱이 홍 부총리는 국회 기재위에 출석한 상태였기 때문에 청와대 대변인실의 공식 발표를 알지 못했다"면서 "(홍 부총리가) 공식 발표를 확인하지 못한 채 국회에서 대통령과의 면담 및 발표 사실을 확인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덧붙였다.
홍 부총리가 문 대통령의 인사권과 보안을 고려해서 반려를 통보받았음에도 이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굳이 그 자리에서 반려된 사직서를 국회에서 대놓고 공표한 배경은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여당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시로 해석되는 것도 이때문이다.
일단 문 대통령이 홍 부총리를 재신임하면서 힘을 실어줌에 따라 사태는 일단락 될 것으로 보이지만, 대통령이 직접 불러 재신임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의 표명 사실을 공개한 것은 결과적으로 인사권자에게 누를 끼치는, 고위공직자로서 매우 부적절한 처사라는 지적도 나온다.
여권 관계자는 "부총리가 직을 던진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예산정국이 시작되는 중요한 시기"라며 "토론은 있어도 당정청이 한몸이 된다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철학인데 기강 해이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