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6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한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일본이 한미 간에 조율 중인 한반도 종전선언에 대해 시기상조론을 내세우며 사실상 반대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과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때도 막후 훼방꾼 역할을 했던 일본이 이번에도 재차 발목잡기에 나선 것이다.
일본, 한미일 회동서 "종전선언은 시기상조"…또 집요한 방해공작
일본 교도통신은 6일 복수의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일본 정부가 최근 미국에서 열린 한미일 북핵수석대표 회동에서 종전선언에 대해 '시기상조'라는 태도를 보였다고 보도했다.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를 반복하고 일본인 납치 문제가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북 '융화'(融和) 분위기만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교도통신은 전했다.
전임 아베나 스가 내각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 온건파인 기시다 내각 역시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전혀 다르지 않음이 확인된 셈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연합뉴스사실 일본이 종전선언에 반대한다는 것은 이미 여러 소식통에 의해 알려져 있었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마키노 요시히로 전문기자는 4일 자유아시아방송(RFA)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는 (한미가) 종전선언 내용을 검토하고 있는 것 자체를 거부하면서 10월말 워싱턴에서 있었던 한미일 고위급협의에서도 반대 입장만 되풀이했다고 듣고 있다"고 밝혔다.
이기동 국가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도 이날 자체 토론회에서 종전선언의 장애요인 중 하나로 일본 변수를 언급했다.
그는 "종전선언은 한반도의 현상 유지가 아니라 현상 변경에 가깝고, 이는 일본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을 것"이라며 "일본이 바이든 정부를 대상으로 종전선언에 대한 집요한 방해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숨은 암초…볼턴 회고록에서도 확인
이런 정황은 최근 한미일 북핵수석 회동 때 성김 미국 대표가 한일 간 엇갈린 주장임에도 뚜렷한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것에서도 감지된다.
일본 측이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고비마다 좌초 시키려 한 숨은 암초였다는 사실은 '볼턴 회고록'을 통해 이미 폭로된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볼턴은 싱가포르 및 하노이 정상회담 등을 앞둔 일본 측 인사들의 대미 로비 행적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 지도부가 매우 거칠고 교활하다"면서 북한에 양보하지 말라고 요청했고, 야치 쇼타로 국가안전보장국장도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 등을 거론하며 오히려 더욱 강한 대북 압박을 주문했다.
한반도 당사자도 아닌 일본이 간섭?…국내 보수층에서 역풍 예상
윤창원 기자
이로 인해 한때 낙관적으로 보였던 북미관계가 '하노이 노딜'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3년 가까운 교착국면에 빠져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타개하기 위한 거의 마지막 카드로서의 종전선언 마저 일본이 또 다시 훼방을 놓는 것은 '가장 가까운 이웃'을 표방하는 양국관계 측면에서도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일본이 종전선언에 반대한다는 사실은 한국 내 반감을 키운다는 점에서 종전선언 자체에는 꼭 부정적이라고 할 수 없다.
한국 내 일부 보수층은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 등 안보상의 이유로 종전선언에 부정적이지만,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도 아닌 일본이 간섭하는 태도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반발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