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이거 받아. 난 장미꽃 한 송이면 돼."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성북구의 한 가정집. 주철광(고등학교 3학년)군이 김태훈(46) 대표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이날은 철광군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날이다. 철광군은 수줍다는 듯 꽃다발에서 장미 한 송이만 꺼내들곤 곧장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김 대표는 2층짜리 주택에서 철광군을 포함해 10명과 함께 산다. 이곳은 김 대표가 운영하는 그룹홈 '가족'과 '한식구'. 김 대표를 제외하곤 모두 북한에서 넘어온 북한이탈 청소년들이다.
꽃다발을 잠시 바라보던 김 대표는 "코로나만 아니면 우리 식구가 다같이 가서 축하해줬을 텐데 아쉽다"며 "대신 이번 설에는 강원도 철원으로 가서 다같이 차례를 지내고 쉴 예정"이라고 말했다.
우리들의 성장이야기 김태훈 대표와 '가족'·'한식구' 아이들. 김명중 작가봉사활동서 탈북민 만나고…'총각엄마'로 산 16년
김 대표는 '총각엄마'로 불린다. 16년 가까이 탈북 청소년들을 보살펴왔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이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에는 그가 대표로 있는 비영리단체 '우리들의 성장이야기' 업무를 본다. 후원자 모집과 밀린 서류를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 아이들에게 먹일 저녁 메뉴가 고민이다.
2015년 인천공항에서 김태훈 대표와 아이들이 함께 찍은 사진. 김태훈 대표 제공김 대표는 어쩌다가 총각 엄마가 됐을까. 그는 직장인이던 2006년 당시 우연히 탈북민을 위한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하룡이'를 만났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하룡이는 어머니와 함께 이제 막 한국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하지만 생계 유지가 걱정이었다.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비웠고, 하룡이는 혼자 불꺼진 방에서 잠들었다.
김 대표가 집을 방문한 어느 날도 하룡이는 혼자 집에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 '너 때문에 전쟁이 난다'는 말을 듣고 상처를 입은 날이기도 했다. 외롭고 무서웠을까, 하룡이는 김 대표에게 하룻밤을 자고 가라고 했다. 그날 밤 김 대표는 하룡이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탈북청소년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김 대표는 "당시 하룡이는 어둠 속에서 혼자 웅크리고 있는 아이 같았다"며 "하룡이와 하루를 같이 보내며 얘기를 나눴고, 그날을 계기로 탈북청소년 그룹홈을 운영하게 되고 새로운 가족들을 만났다"고 말했다.
유튜브로 성장기 전하며 "탈북민 편견 깨고 싶어요"
김 대표는 따로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날 시간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대가족과 지내고 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탈북청소년 10명. 1층은 동생들이, 2층은 형들이 사용한다. 김 대표는 방이 없어서 거실에서 잔다.
안정된 듯 보이지만 그룹홈을 꾸리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부모님의 반대가 컸다. 김 대표는 "그룹홈을 운영한 몇 년간은 아예 부모님께 연락도 못 드렸다"며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저를 이해해주셨고, 이제는 우리 그룹홈의 가장 큰 후원자다"고 말했다.
다만 운영비 등 현실적인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 정부 지원금은 매달 운영비 35만원과 1인당 하루 식비 1500원이 전부다. 나머지는 김 대표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
조청룡군과 주호빈군이 사용하는 방. 정성욱 기자김 대표는 아이들의 성장기를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이들의 모습은 유튜브 채널 '총각엄마TV'에 담긴다. 여행 브이로그를 찍기도 하고 아이들이 요리하는 모습도 촬영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탈북 청소년'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다는 것. 덕분에 영국 공영방송 BBC에 김 대표네 가족 이야기가 소개되기도 했다.
김 대표는 "'북한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보는 것 같은데, 똑같이 순수하고 해맑은 아이들"이라며 "오히려 이런 아이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많이 알리면서 편견을 깨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유 좋아하고요, 체육계에서 일하고 싶어요"
김금성군의 방 침대에 가수 아이유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정성욱 기자
김 대표의 말대로 이곳 아이들은 여느 학생들처럼 놀기를 좋아하고 '덕질'도 한다. 2019년 탈북한 김금성(고1)군은 가수 아이유의 팬이다. 금성군의 침대에는 아이유의 사진이 걸려있다.
한국에서 배운 태권도로 진로 방향도 잡았다. 금성군은 "북한에 있을 때도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태권도 관장님이랑 운동을 하면서 장래희망도 체육쪽으로 생각하게 됐다"며 "'한국은 가난하고 무서운 곳'이라고 들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조청룡(고2)군은 바리스타가 목표다. 2018년 친누나와 함께 탈북한 청룡군은 제빵과 바리스타 분야를 배우고 있다. 다만 연애는 아직이다. 청룡군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라고 말끝을 흐렸다.
주호빈군은 자신의 작품을 SNS에 올리고 공유한다. 정성욱 기자김 대표네 집 곳곳에 전시된 그림은 주호빈(고2)군의 작품이다. 호빈군은 중학생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미대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 SNS에는 자신이 그린 작품을 올린다.
김 대표는 "아이들이 각자 하고 싶은 게 다른데,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도우려고 한다"고 말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맞는 설…"남들처럼 똑같이 먹고 놀 거예요"
지난해 추석, 강원도 철원의 카페에서 다같이 차례를 지내고 있는 아이들. 우리들의 성장이야기 제공김 대표와 아이들은 올 설에 강원도 철원으로 향한다. 철원에는 김 대표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 그룹홈 출신인 탈북 청소년들이 직접 커피를 내린다. 김 대표가 그룹홈 운영비에 보태기 위해 마련한 곳이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하다 보니 수익은 변변치 못하다. 그럼에도 탈북 청소년이 직업을 얻고 사회성을 배운다는 건 성과다.
철원 카페에서는 북한이 보인다고 한다. 한국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 중 하나인 셈이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함께 차례상을 차린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거나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절을 하고 술을 따른 뒤 북쪽으로 뿌린다.
차례를 마치면 있는 힘껏 쉰다. 숙소를 잡고 뜨끈한 방 바닥에 누워서 쉬는 게 목표다. 10명이 넘다 보니 팀을 나눠서 축구도 할 계획이다.
"명절 때 보통 쉬잖아요. 저희도 똑같아요. 차례가 끝나면 각자 방에서 있는 힘껏 쉬려고 해요. 그게 명절이잖아요." 김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