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 추월에 출전했던 노선영(왼쪽)과 김보름. 이한형 기자4년 전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이른바 '왕따 주행'.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 추월에 나선 한국 대표 선수 3명 중 1명만 뒤처져 국내외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은 사건이었다.
4년이 지나 왕따 주행의 고의성 여부와 누가 피해자인지에 대한 법원 판결이 내려졌지만 패소한 측에서 항소하면서 법정 공방 2라운드가 펼쳐질 전망이다.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36부(황순현 부장판사)는 김보름(29·강원도청)이 노선영(32)을 상대로 제기한 2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3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노선영이 김보름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게 된 것이다. 재판부는 2017년 11~12월 노선영이 대표팀 후배인 김보름에게 폭언, 욕설한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2017년 11월 이전 폭언은 소멸 시효가 지나 배상 범위에서 제외됐다.
이에 노선영 측은 판결에 불복해 17일 곧바로 항소했다. 노선영 측은 21일 법조 출입 기자들에게 보낸 입장문에서 "1심 재판부는 폭언과 관련한 김보름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는데 이와 관련한 직접적인 증거는 소송을 제기한 지 7개월이 지나 김보름이 제출한 훈련 일지가 유일했다"고 주장했다. 김보름의 일방적인 진술만 재판부가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보름 측은 이같은 주장을 일축했다. 김보름의 변호인은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동료 등에 대해) 증인 신청을 하겠다고 했더니 '사실 확인을 다투지 않겠다'며 노선영 측에서 거부했다"고 밝혔다. 또 "일방적 폭언이 아니었다"는 노선영 측의 주장에 대해서는 "4년 위 선배에게 폭언을 할 수 있었겠느냐"며 부인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김보름(왼쪽부터), 노선영, 박지우가 훈련하는 모습. 이한형 기자노선영이 김보름에게 욕설을 했는지 여부는 양 측의 입장이 다른 만큼 3자의 얘기를 들어보는 게 가장 깔끔하다. 그래서 김보름 측은 증인 신청을 했지만 어쩐 일인지 노선영 측은 이를 거부한 모양새다. 특히 1심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팀 추월에서 두 사람과 함께 출전한 박지우(24·강원도청) 등 동료들의 사실 확인서에는 노선영이 폭언과 욕설을 한 사실이 적시돼 있다.
제 3자인 동료들의 확인서에 대해서도 노선영 측은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노선영)의 폭언과 욕설은 원고(김보름)의 스케이트 속력에 관한 것으로 '천천히 타면 되잖아, 미친 X아'와 같은 내용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사실 확인서와 김보름의 훈련 일지를 보면 노선영은 김보름이 스케이트를 빠르게 탄다는 등의 이유로 2017년 11월 7일, 28일과 12월 20일 폭언과 욕설을 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욕설의 표현과 날짜까지 너무나도 구체적이다. 노선영 측의 주장과는 상반된다. 욕설의 대상이 된 당사자(김보름)이나 옆에 있던 제 3자(박지우 등)는 맞다고 하는데 정작 욕설을 했다는 노선영만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노선영 측은 "일방적인 폭언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김보름도 노선영에 대해 폭언을 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일단 노선영이 폭언을 했다는 전제가 은연 중에 깔려 있다. 이른바 쌍방 폭행을 주장하는 모양새인데 결국 폭언은 있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4년 선배에게 폭언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김보름 측의 주장은 100% 신뢰할 수 없다고 해도 누가 먼저 폭언을 했는지에 대한 단초는 제공할 만하다.
특히 앞서 노선영 측은 폭언 등을 시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지난해 1월 소송 재판 첫 변론기일에서 노선영 측 대리인은 "폭언과 폭행이 운동 선수들 사이에서 불법 행위가 성립하는지 판단을 따라야겠지만 피고(노선영)는 원고(김보름)보다 한국체육대 4년 선배이고 법적으로 사회 상규를 위반하지 않은 정도였다"면서 "만약 그것(폭언)이 불법 행위가 된다 해도 이미 2011년, 2013년, 2016년 일로 불법 행위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했다.
노선영 측의 주장을 보면 이미 노선영은 지난 2017년뿐만 아니라 한체대 및 강원도청 시절부터 김보름에 대해 폭언과 폭행을 가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표현에서 특히 폭언, 폭행에 대한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여자 팀 추월 문제의 '왕따 주행' 경기 모습. 김보름(왼쪽), 박지우(오른쪽)이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가운데 노선영이 뒤처져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왕따 주행도 고의성이 없는 것으로 법원이 다시 결론을 내렸다. 이미 평창올림픽 이후 문화체육관광부의 특별 감사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김보름과 박지우의 랩 타임을 보면 마지막 바퀴에서 가속을 했다는 점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선영은 올림픽 이후 일부 매체와 인터뷰에서 "기록이 중요하지만 그렇게 올릴 타이밍은 아니었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김보름과 박지우가 자신을 따돌리기 위해 가속했다는 뉘앙스지만 기록을 높여야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 상황, 특히 온 힘을 쏟아붓는 레이스 막판에 속도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판단이다.
패소한 노선영 측이 항소한 이 재판은 간단하게 풀릴 수 있다. 양 측의 의견이 첨예하게 맞선 만큼 제 3자의 입장을 들어보면 된다.
물론 노선영 측은 증인들이 김보름 측에 유리하게 증언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누구의 말을 듣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인가. 노선영 측의 말만 듣고 판결을 내려야 하나? 그게 재판인가?
더욱이 증인 중 1명인 박지우는 논란의 팀 추월 경기 이후 김보름과 백철기 당시 대표팀 감독이 나선 기자회견에 노선영이 불참한 뒤 함께 커피를 마셨던 후배다. 당시 노선영은 감기를 이유로 예정된 회견에 불참한다고 백 감독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박지우와 팔짱을 낀 채 선수촌 밖으로 외출해 커피까지 마시는 모습이 포착됐다.
2018년 노선영은 취재진이 질문하는 기자회견을 피하고 한 매체와만 인터뷰했다. 노선영은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만 전달했던 특정 언론사와 공정하게 판결을 위해 양 측은 물론 제 3자의 입장까지 헤아리는 재판부를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