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아의 딸' 배우 하윤경이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세상에 지고 싶지 않은 딸 연수는 어느 날 대학 동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헤어진 남자친구로 인해 평범했던 일상이 송두리째 뒤집히게 됐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솟구치는 두려움에 연수는 괴롭기만 하다. 여기에 더해 이해는 못 해도 사랑은 하던 엄마의 책망까지 이어지며 연수는 더욱 힘든 상황에 놓인다.
영화 '고백' '사냥의 시간' '타클라마칸' 등은 물론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등을 통해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탄탄하게 쌓아가고 있는 배우 하윤경의 최근작 '경아의 딸'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평범한 교사이자 한 사람의 존재이자 누군가의 딸이자 피해자라는 모습을 모두 아우르면서도 누군가에게 또 다른 피해나 상처를 안겨선 안 되는 역할이었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한 하윤경이 가장 많이 말한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고민'이다. 그만큼 '경아의 딸'과 '연수'는 연기하지 쉽지 않았고, 잘 표현하고 싶은 만큼 스스로에게 많은 고민을 안겼다. 하윤경의 치열한 고민이 있었기에 우리는 연수에 좀 더 마음 깊이 다가가고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 '경아의 딸'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김정은 감독이라면 후회 없이 작업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경아의 딸'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감독님이 날 좋게 보고 연락을 주셨다. 시나리오를 읽어봤는데 너무 좋아서 회사에 무조건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해서 감독님과 미팅을 했는데, 감독님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셨는지 느꼈다. 오랜 시간 준비했고, 디테일하게 다 고민한 게 느껴져서 후회 없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처음 대본을 받아 읽어본 후 감상이 궁금하다. 디지털 성범죄는 어떻게 보면 되게 자극적일 수도 있는 소재라 그저 소재로만 끝나거나 기능적인 걸로만 소비되면 어떡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대본을 읽고 감독님을 만났을 때 기우였다는 게 느껴졌다. 오히려 너무 조심스러운 나머지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우면 영화가 재미없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 아까 김정은 감독을 만난 후 많은 준비를 한 분이라는 걸 느꼈다고 했다. 실제로 함께 작업하며 만난 현장에서의 감독님은 어떤 분이었나?
감독님은 나랑 동갑인데 나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면모를 갖고 있다. 나는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 데 반해 감독님은 수줍음이 많다. 말도 조곤조곤하게 하시는데, 그런 섬세한 면이 촬영 중에도 많이 나왔다. 큰 디렉션을 주는 게 아니라 눈빛, 대사 톤 등을 많이 조절했는데, 나 역시 이런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라 하나하나 다듬어 가는 과정이 재밌었다.
어떻게 보면 큰 차이가 없는 걸 바꾼다는 게 누군가에게는 힘든 작업일 수 있다. 그런데 난 그런 디테일한 고민이 너무 즐거웠고, 합의점에 도달했을 때 무척 좋았다. 작업 내내 계속 서로 이야기하며 대본을 수정해 나갔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많이 배웠다.(웃음) 그런 자세가 너무 중요했고, 동갑내기 친구인데도 배울 점이 많았다. ▷ 대본의 어떤 부분들을 수정해 나간 건가? 대표적인 게 엄마가 아파서 입원한 병실에 가는 장면이다. 연수는 늘 엄마를 이해하려 했고, 또 늘 엄마 편이었는데 엄마는 내 곁에 있어주지 않았던, 연수가 그동안 쌓아온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게 엄마를 향한 원망만도 아니고, 또 너무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아닌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촬영 직전까지 계속 이야기해가며 대사를 바꿨다. 나도 내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대사를 제안했고, 감독님도 많이 수용해 주셨다.영화 '경아의 딸' 배우 하윤경이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연수를 그려내기 위해 하윤경이 보낸 치열한 고민의 시간
▷ 대본을 본 후 연수라는 캐릭터에 대해 받은 첫인상은 어떠했는지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 연수라는 캐릭터는 특징이 도드라지지 않는 캐릭터라 더 좋았다.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 같은 캐릭터였다. 연수가 범죄를 당하게 된 게 특별한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연수의 잘못도 아닌 지점이 연수라는 캐릭터에서 더 보이는 거 같았다. 연수가 특색 있게 보이기보다 직장에서도 잘 지내고 엄마와도 사이가 괜찮고, 잘 자란 평범한 여성이어서 좋았다. ▷ 연수는 이른바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대본을 받고 인물에 대해 생각하고 연기하면서도 어떤 고민과 질문들이 배우의 뒤를 계속 따라다녔을 것 같다.
연수가 입은 피해는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의 상처다. 그래서 그걸 표현하는 데 있어서 너무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면 그게 기만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감정적으로만 다가가고 너무 빠져서 생각하는 것도 영화라는 숲을 봤을 때 의미하는 바가 잘 전달될 수 있을지, 그런 지점에서 많이 고민했다.
감독님과도 이야기했던 게 연수가 느끼는 감정의 수위를 어느 정도까지 보여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 피해자가 가진 전형적인 모습을 피하려고 했다. 또 담담한 속에서 그렇기에 더 고통스러울 거 같다는 느낌이 있었기에 그런 걸 전달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떤 사건도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엄마와의 관계에 변화가 온다. 엄마와 딸의 오묘한 관계와 그 안에서의 상처 등을 표현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말했다시피 흔히 성범죄 피해자들을 향해 사회는 물론이고 가까운 사람들마저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피해자의 모습을 너무 피해자처럼, 또 너무 아무 괴로움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그 미묘한 차이를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었을 거 같다.
피해자다움을 표현하지 않는 것도 어렵다. 그렇게 되면 '연수는 왜 이렇게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연수는 괜찮지 않다. 그래서 어려웠던 게 내가 가만히 있는 순간에도 연수의 상처가 느껴져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 '경아의 딸'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연수는 자신의 문제로 인해 내적·외적 어려움에 부딪히는 한편 엄마와의 관계로도 고민한다. 이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찾아오는 연수는 엄청 복잡한 캐릭터다. 엄마와의 관계와 나의 개인적인 사건에 대한 고민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비등하게 가져가고 싶었다. 그리고 연수는 가부장에 순응하던 어머니와 미래 세대인 연수의 제자 하나 사이에 끼인 세대고, 거기서 갈등이 생기는 거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열려 있는 여성이자 교사가 되고자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다음 세대인 하나에게 엄마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연수만의 스토리라인을 많이 생각했고, 엄마와의 사건을 통해서 생기는 변화를 조금은 멀리서 보려고 했다.
▷ 촬영하면서 감정적으로나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나 어려웠던 장면은 무엇이었나? 연수가 울거나 감정적인 장면이 꽤 많이 있다. 그렇기에 관객에게 너무 피로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연수가 너무 징징거리고 힘들어하면 관객들이 그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될까 감정 표현에 대한 조절을 많이 고민했다. 마냥 다 똑같이 엉엉 울고 힘들어하는 게 아니라 복합적인 감정으로부터 눈물이 나온다. 이를 다 다르게 표현하고, 또 어떻게 해야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는 표현이 될지 정말 고민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했다.
▷ 예비 관객들을 위해 '경아의 딸'은 '이런 점에서 꼭 봐야 할 영화'라고 이야기한다면? 범죄에 대한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인해서 가족과의 균열, 일상에서의 균열을 겪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사건이나 균열을 겪을 수 있기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구시대적인 것과 새 시대 사이 과도기에 놓인 딱 지금 세대들이 겪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내 또래분들이 부모님, 미래 세대와도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다. 생각할 지점이 너무 많아서 모든 분이 보시면 좋을 거 같다.(웃음)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