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융촌 입구 만융조선족촌이라는 간판. 안성용 기자뜨거운 여름 태양이 작렬하던 8월 중순 동북3성의 하나인 랴오닝성 성도 선양에 있는 조선족 마을 만융촌을 찾아 나섰다. 선양은 재해가 없어 살기 좋은 땅으로 불리는 곳으로 상주 인구가 910만인 중국 동북지역 최대 도시다. 만융촌은 선양 도심에서 택시로 1시간 거리에 있다.
만융촌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풍경은 너른 평지에 농작물이 자라는 전형적인 교외의 농촌 모습이었다. 만융촌 입구도 주변과 크게 다르지 않아 출입문 위에 크게 세워진 입간판이 아니면 조선족 마을임을 알기는 어렵다.
고건 총리가 다녀간 기념비. '발전을 기원한다'고 적혀있다. 안성용 기자마을에 들어서서 왼쪽에 1999년에 고건 전 총리가 다녀갔다는 기념비, 오른쪽에는 '백의민족의 자랑'이라는 비가 있고 그 뒤에 황금색으로 칠해진 장구 치는 여인과 가야금 타는 여성의 상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안쪽에 펼쳐진 풍경은 농촌 마을보다는 중국 일반 도시의 주택 단지와 비슷했다. 옛날에는 전부 초가집이었고 어쩌다가 기와집이 있었지만 1995년에 다 허물고 아파트를 지었기 때문이다.
장구와 가야금을 연주하는 여인상. 안성용 기자여느 조선족촌과 마찬가지로 만융촌도 한반도에서 이주한 조선인들에 의해 1934년에 세워졌다. 특이한 것은 만융촌 호적에 등록된 사람들이 100% 조선족이라는 것이다. 한족은 받아주지 않고 조선족들만의 마을로 꾸려 순수 조선족 마을 중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호적상 잘 나갈 때 1500가구가 등록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880여 호로 줄었다. 그래도 한 가구당 3명 정도로 계산하면 2천명이 넘는 대규모 조선족 마을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곳에 사는 조선족은 얼마 안 된다. 호적만 만융촌에 두고 상당수가 한국으로, 중국내 다른 지역으로 갔기 때문이다. 동북지역 조선족 마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2500명 정도가 한국에 가 있다고 하는데 명절 때면 이들 중 80% 가량이 돌아와 동네가 북적댄다고 한다.
만융촌 아파트 집집마다 설치돼있는 위성안테나. 한국방송 수신용이다. 안성용 기자만융촌의 전체 면적은 6200무(약 410만㎡)로 상당히 넓다. 만융촌에 호구가 있는 사람은 한국에 살건 중국에 살건, 어린 아이든 노인이든 1.6무(약 1천㎡)의 땅에 대한 사용권이 있다. 현재는 이 땅을 한족에게 임대 주고 매년 사용료를 받고 있다.
만융촌이 100% 조선족으로 유지되는 요인이다. 조선족 1대들이 논으로 개간해 벼농사를 지었지만 물이 부족해 지하수를 퍼올려 쓰다가 전기값을 감당 못해 옥수수 농사로 전환했다.
만융촌 가운데 1만무 정도는 만융한국공업원이다. 조선족과 한국의 인연을 고리로 한국기업을 유치하기 위한 일종의 특구다. 이 곳에 한때 70-80 곳의 한국 기업이 입주했었다. 많은 조선족들도 여기에 취업하면서 1990년대부터 인구 유출을 겪던 다른 조선족 마을에 비해 2005년에 1500여 가구가 호적을 둘 정도로 번성했다.
그러나 비싸지는 인건비 등으로 한국 기업들이 동남아 등지로 빠져 나갔고 빈자리를 한족 기업이 채웠다. 지금 남아 있는 한국기업은 한두 곳에 불과하다. 만융촌에 살던 조선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가고 입주 기업들을 따라서 동남아 등지로 옮겨가면서 이 마을에 호구를 두고 실제로 사는 조선족은 얼마 안 되고 그나마 노인들과 아이들뿐이다.
만융촌 노인회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주민들. 안성용 기자동북3성의 조선족 마을이 해체되면서 찾아온 조선족들도 200여명 되는데 이들은 호구 없는 거주자들이다.
중국 최대의 조선족 단일촌인 만큼 이 곳에도 조선족학교가 있다. 만융촌 안에 초등학교가 있고 마을 밖 멀지 않은 곳에 조선족 중고등학교가 있다. 또 선양 시내에는 조선족 제1, 2중학교가 있어 우수한 조선족 학생들이 진학한다.
초등학교는 1938년에 세워질 정도로 역사가 깊다. 하지만 미래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말하는 이나 듣는 사람이나 고통스럽다.
이 곳에서 7, 80년대에 초등학교를 나왔다는 한 조선족은 "통계에 따르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연령대 10만 명이 한국에 가 있다. 아이를 낳으면 다시 한국 또는 남방으로 간다"며 동북지역에서 조선족 인구가 감소할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를 짚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학교 다닐 때는 학생수가 4, 500 명 정도 됐지만 이제는 60명 정도에 불과하다며 난감해 했다. 미래에 대해서는 더 비관적이었다. "학교가 제일 문제다. 계속 이어 가야 하는데 언젠가는 끝난다. 애들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래도 여기가 제일 큰 동넨데…"
선양 조선족 밀집지인 시타에 있는 '심양시조선족제6중학'. 안성용 기자만융촌 관계자는 이제는 조선족만의 마을로서 특별한 것도 없고 보여줄 것도 없다고 했다. 실제로 곳곳에 보이는 한글 간판 빼고는 조선족 마을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노인들과 아이들만 남은 마을에 곳곳에서 삼삼오오 이뤄지는 대화를 듣다보면 여기가 한국 땅인지 중국 땅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직은 우리말이 살아 숨 쉬는 곳이라는데 위안을 받는다. 깔끔하게 정리된 노인회관에서도 한국으로 자녀들을 보낸 노인들이 탁구와 마작 등의 놀이를하며 한국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 아파트와는 달리 만융촌의 아파트에는 위성방송 수신 안테나가 엄청 많았다. 한국 방송을 수신용이라고 했다. 하늘을 향해 손벌리고 있는 안테나가 한반도 고국을 그리워하는 조선족의 모습처럼 다가왔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