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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익 학살'' 과거를 화해와 용서로 보듬는 구림마을

사회 일반

    ''좌우익 학살'' 과거를 화해와 용서로 보듬는 구림마을

    정권 바뀔 때마다 희생자와 가해자 구분 모호…''구림위령비''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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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가 짙게 낀 새벽이었습니다. 5시쯤 됐을까... 총 소리에 놀라 뛰어 나오는 마을 사람들에게 경찰의 무차별 사격이 가해졌지요. 무슨 일인가 담 밖을 내다보던 사람, 도망가던 사람,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살육이었습니다"

    59년 전 일이지만 최재영 할아버지(80)가 기억하는 1950년의 그 날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전남 영암 구림마을에서 당시 20살이던 최 할아버지는 경찰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 90여 명을 학살한 ''영암구림 첫 포위 사건'' 당사자다.

    ''첫 포위 사건'' 말고도 한국전쟁 당시 이 지역은 점령 세력이 바뀔 때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던 지역이다.

    인민군이 영암에 입성하기 직전 보도연맹에 대한 학살이 있었고, 인민군이 입성한 직후에는 경찰과 우익세력에 대한 숙청이 자행됐다. 다시 국군이 수복했을 때는 공산세력에 동조한 민간인들에 대한 군경의 대량 학살이 있었고 전쟁이 게릴라전으로 장기화된 이후에는 빨치산과 국군이 번갈아 영암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농사일밖에는 모르는 수많은 민초들이 희생됐다.

    최운호 할아버지(72)는 한국전쟁 발발후 미국 주도의 UN 반격 당시,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들이 경찰 가족 등 20여 명에 대해 보복살인을 저지르던 장면을 떠올렸다.

    "시뻘건 불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살려 달라며 뛰어다녔어요. 간신히 불길을 헤치고 나온 사람들도 죽임을 당했지요. 당시 초등학생이던 내 친구도 거기서 죽었고요"

    이처럼 점령세력이 바뀔 때마다 희생자와 가해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수십년 동안 함께하며 벼를 베던 담 너머 이웃들은 내 부모와 형제를 죽인 철천지원수가 돼버렸다.

    다들 바람 부는 대로 쓸리는 민초들이었지만, 야만의 시간을 거치며 보복의 악순환은 51년까지 계속됐다.

    76년 순절비가 세워졌지만 빨치산과 좌익에 의해 희생된 이들 만을 위한 것이었다.

    오랜 군부독재 시절 동안 경찰과 우익에 의해 희생된 이들은 위령비는커녕 왜 죽었는지조차 입도 뻥끗 할 수 없었다.

    현삼식(62)씨는 "진실을 말했다가는 공산주의자로 몰리던 시절이 있었다"며 "과거사 규명 작업을 위해 조사관이 증언을 부탁해도 손가락질 받으실 게 두려워 아직까지 입을 여시지 않는 분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이후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가해자가 좌익이든 군경이든 무고하게 숨진 민초들의 원혼을 함께 위로하고 화해하자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구림마을 주민들은 지난 2006년부터 좌우익 구분 없이 희생자 모두를 기리는 ''구림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길이 7m, 높이 4m에 이르는 이 비에는 순절비에 기록된 희생자들을 포함해 좌우익 희생자 270여 명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질 예정이다.

    이 같은 움직임에 최운호 할아버지는 "이 시점에서는 가해자 처벌보다 진실규명과 화해가 필요하다"며 "전쟁통에 나를 죽이려했던 사람이 살아있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2010년 마무리짓기로 한 이 사업은 그러나 정부당국의 무관심 속에 진척을 내지 못하고 있다.

    구림위령비건립추진위 정석재(61) 사무국장은 "이명박 정부 들어 과거사위 예산도 삭감됐다고 하고 한나라당은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통폐합하겠다고 나서니 우리 사업도 함께 위축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 국장은 특히 정부당국의 이 같은 무관심이 50여 년 전과 다를 바 없는 한국사회의 이념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씨는 "이 어려운 시기에 아직도 두 패로 갈려 이념논쟁을 하는 걸 보면, 한 치도 변하지 않은 현실에 답답하고 안타깝다"며 ''''쓸데 없는 이념갈등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일들은 잊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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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씨는 또 "서민들은 이처럼 화해하고 용서하는데 정치권은 시기마다 지역감정을 되살리고 이념논쟁을 부추겨 용서와 화해를 가로막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원통하고 허망한 죽음 뒤로 간신히 화해의 움직임이 시작됐지만 이런 노력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전남 작은 마을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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