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1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생명과 지역을 살리는 필수의료 혁신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복지부 제공'많으면 3천명' 등 파격적 규모가 될 수도 있다던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확대는 기존의 의지를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지난 19일 '필수의료 혁신전략 회의'를 주재한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 지역·필수의료가 붕괴되고 있다"며
"일단 의사가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의료개혁을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밝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인 임상의사 수(인구 1천명당 2.6명, 가입국 평균은 3.7명)가 부족하다는 전제에는 동의한 것이다.
다만 이날
발표된 대책에서 초점을 맞춘 키워드는 '지방'이었다.
지방 국립대병원을 서울 '빅5' 수준으로 키워 집 근처에서 진료 받는 '지역완결적 필수의료'를 구축하겠다는 게 골자다.
윤 대통령은 "우리나라 지역과 수도권 간 불균형 발전, '지역 격차'라고 하는 것이 교육과 의료에 달려 있다"며 이 문제가 해결돼야 '제대로 된 지방시대'가 열릴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 발언이 나온 회의 장소도
비수도권 국립대병원인 충북대병원이다.
의료인력 확충도 '지방 국립대'를 중심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당초 가장 큰 관심사였던 의대정원 문제가 후순위로 밀린 이유는 뭘까. 정부가 지역의료에 방점을 찍은 맥락을 큐앤에이(Q&A)로 정리했다.
Q. 의사 수를 늘리겠다는 대통령의 '공언' 외 의대정원 정책은 진전이 없는 것 아닌가.A: 정부의 의지가 변한 것은 아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이 치르게 될 대학입시부터 의대정원 증원이 반영되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이번 브리핑에서도 "정부는 2025년도 입학정원 확대를 목표로 관련 업무와 정책을 착실히 추진해왔다"고 밝혔다.
내후년 대입안(案) 확정까지 남은 시일이 많지 않음을 지적하며, 연내 의사단체와 합의가 가능할지를 묻는 질문에는
"현장의 수용 가능성과 교육역량 등을 충분히 검토하여 신속하게 추진해 나갈 예정"이라고 답했다. 정부는 정원 확대를 희망하는 의대 수요부터 조사할 계획이다.
의·정 충돌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두고 조 장관은
"의료인력 확충을 위한 의대정원 확대에 국민 여러분들의 기대가 큰 만큼 의료계도 정부와의 협의에 적극 협력해 주실 것으로 기대한다"며 우회적으로 대한의사협회(의협)를 압박하기도 했다.
Q. 정작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증원규모를 빠뜨린 것은 '모순'이란 지적도 있다.A: 실제로 정부 발표 이후
'알맹이가 빠졌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각 대학이 2025학년도 수시모집 요강을 발표하는 시점은 내년 4월이다.
'늦어도' 3월까지는 늘어난 의대정원이 대학별로 확정돼야 한다는 뜻이다. 세부 논의에 소요될 시간을 감안하면 연내 대략적인 확대 규모가 결정돼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나온 배경이다.
하지만 정부로서는
전공의까지 연계된 총파업 등 '파국'을 예고한 의료계의 반발을 외면할 수 없었다는 분석이다.
앞서 지난 11일부터 정부가 '이르면 이달 중' 의대정원 증원안을 발표할 거란 언론 보도가 잇따르자 의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반응을 보였다.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2020년에 타결된 9·4 합의를 들어 "기만", "배신" 등의 거친 표현도 쏟아냈다. 의대정원 문제는 '코로나19 안정화 이후 의·정 협의체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의협과 논의한다'는 약속을 위반했다는 취지다.
지난 17일 '의대정원 확대 대응을 위한 긴급 의료계 대표자 회의'에서 2020년 9·4 합의 이행을 촉구하고 있는 대한의사협회 이필수 회장. 의협 제공올 1월 재개된
의료현안협의체에서는 아직 의대정원을 실질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의료계 패싱' 논란도 일었다. 증원 폭이 '최소 500명'을 넘어 수천 명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자 의협은 17일 긴급소집한 의료계 대표자 회의에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 강력히 저항하겠다"는 강경투쟁 방침을 밝혔다. 이에 따른 "의료공백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정부에 있다"고도 못박았다.
이처럼
3년 전 '집단휴진'이 재현될 수 있다는 엄포에, 정부가 속도조절에 나섰다는 게 중론이다. 절차상 잡음으로 진행 자체가 무산돼선 안 된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도 "의료 혁신의 목적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며
"정책 효과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현장 의료인, 전문가들과 충분히 소통하겠다"고 의료계와의 '소통'을 강조했다.
Q. '18년째' 3058명인 의대정원의 과거 증원시도가 실패한 이유는. A: 관련 여론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가운데 사전 소통의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예가 전임 문재인 정부다.
지난 2020년 7월 복지부는 매년 의대 정원을 최대 400명씩 10년간 늘려 한시적으로 유지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OECD 보건통계 상 의사 수가 정책 근거에 활용됐다는 점이나 추가양성 인력을 의사가 부족한 지방(의료취약지) 등에 종사토록 하겠다는 계획은 큰 틀에서 현재와 유사하다.
당시 의료계는 진료 거부와 동맹휴학·국시 응시 거부에 이르기까지 의협과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의대협) 모두 거세게 반발했다.
감염병 유행상황에서
정책이 졸속 추진됐다는 비판에 더해 '공공의대 논란'은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 공공의대는 입학 후 일정기간 공공의사로 근무할 것을 전제로 하는데, 시·도 지사나 시민단체의 추천으로 신입생을 선발하겠다는 구상이 전공의·의대생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평가기준의 객관성 등이 공정성 시비에 휩싸이며 논란이 커졌다.
공공의대 및 지역의사제는 시민사회계가 줄곧 꼽아온 대안이지만, 현 정부도 이같은 맥락에서 검토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복지부 제공Q. 그럼 지방 국립대병원을 '서울 대형병원 수준'으로 육성하겠다는 건 어떤 뜻인가.A: 지방에 사는 주민들이
집 근처 국립대병원에서 최종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필수의료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이었다면, 올해는 연이은 '응급실 뺑뺑이'라 할 수 있다. 중증응급 환자를 '원스톱'으로 치료 가능한 관내 의료기관이 줄면서 이송병원을 찾다가 골든타임을 놓친 사망사례들이다.
필수의료 분야 의사가 전반적으로 부족한 데다 그나마도 수도권에 쏠리는 경향이 뚜렷한 탓이다.
꼬박 하루가 걸려 일명 '빅5' 상급종합병원(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가톨릭대서울성모병원·신촌세브란스병원·삼성서울병원)을 찾는 비수도권 환자들의 상경도 익숙한 풍경이 됐다.
정부는 우선
국립대병원의 교수정원을 대폭 늘리고 인건비 규제를 풀어 경쟁력을 강화할 방침이다.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지만 수익성은 낮은 외상·분만 등 필수의료센터에 대한 보상도 지속적으로 늘린다. 노후화된 진료 시설·장비 또한 정부 지원을 확대해 첨단화하기로 했다.
국립대병원의 소관부처 이관(교육부→복지부)
도 전국 17개 국립대병원을 지역·필수의료 거점으로 내실 있게 키우기 위한 일환이다.
Q. 의료계가 주로 요구해온 사항들은 결이 좀 다르지 않나. A: 지역·필수의료 육성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사단체도 공감하고 있다. 물론 의협은 의사 수 부족이 필수의료 약화의 최대 원인이라는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 성형·미용 등
비(非)필수과에 비해 턱없이 낮은 외과·소아청소년과 등의 수가를 획기적으로 인상하는 게 급선무라는 입장이다. 충분한 보상으로 자발적 인력 유입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수용 입장을 밝힌 정부는 이러한
공공정책수가에 1년간 약 1조 규모의 건강보험 재정이 투입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의료계가 가장 강력하게 주장해온 '의료사고 법적부담 완화'도 추진한다. 정상적인 필수의료행위 중 발생한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 대해서는 형사책임을 덜어주는 것이다. 정부는 먼저
불가항력 분만 의료사고 관련 보상을 전액 국가가 부담하는 방안 등을 마련할 예정이다.
윤 대통령도 2017년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사건을 언급하며 "소아과 등에 의사가 부족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며
"정부가 책임보험 시스템 같은 것들을 잘 만들어서 기본적으로 (필수의료 의사들의) 형사 리스크를 완화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