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 보는 구직자. 연합뉴스▶ 글 싣는 순서 |
①'노인 지옥' 죽거나 죽이거나…흉기로 변한 빈곤 ②평균 퇴직 49.4세…'죽음의 계곡' 떠밀리는 나라 ③"안녕하세요, 신입입니다. 71살이고요" ④'月60만원' 쥔다는데…'연금'보다 '연장' 중한 까닭 ⑤정년 늘리면 청년은요?…엇갈린 시각서 찾는 해법 (끝) |
25살 변모씨는 취업 준비를 시작한 지 1년이 다 돼간다. 대학 마지막 학기부터 스펙을 위해 계약직이나 비정규직 신분으로 일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고 190만 원 정도를 받으며, 신입 채용 공고는 가뭄에 콩 나듯 날 뿐 대부분이 경력직 공고였다.
변씨는 "고령층이 빠져나가지 않으면 채용시장에 신규 일자리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이 있다"며 "정년연장은 당연히 청년층에게 부담과 압박"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노인 빈곤율도 심각하고 국민연금을 받는 시기도 늦춰지면서 (소득 없는) 공백기로 고충이 있는 건 알지만 청년층이 타격을 받으면서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정년에 다 걸려 일하고 싶어도 취업을 못한다." 65세 김모씨는 지난 20년간 한 기업 급식실에서 조리사로 일하다 석 달 전 정년 문제로 퇴사했다. 수입이 끊겨 재취업에 나선 그는 "정년을 기점으로 일자리 시장에선 '할머니' 취급을 당한다. 정년 제약이 없는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일이 혹독하고 복지는 한참 뒤떨어지는데 월급도 기존보다 50만 원이나 깎여 100만 원 후반대로 곤두박질친다"고 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새로 땄지만, 김씨는 그간 해온 조리사 일만큼 잘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그는 "우리가 젊은 사람들 일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며 "젊은 사람들이 힘든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우린 젊은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이런' 일을 한다. 정년으로 일이 끊기니 소외감을 느끼고 막막할 뿐"이라고 답답해했다.
2030 "신입 채용 악영향 줄라"…'철밥통' 직장선 수혜 기대도
연합뉴스'정년연장'이란 주제 앞에서 젊은 세대는 신입 채용에 악영향을 줄까 '불안'을, 중장년층 이상은 정년 이후의 생활에 대한 '막막함'을 말하며 엇갈린 시각을 보였다.
2030 젊은 세대는 근로현장을 떠나는 나이가 늦어질수록 청년 고용에 악영향을 줄까 우려했다. 정년이 늘면 그만큼 높은 임금을 차지하는 인원이 많아지면서 회사가 부담을 느껴 청년 고용이 축소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정년연장이 청년 일자리와 상충할 수 있단 지적은 이미 제기됐다. 서울대 경제학과 김대일 교수의 연구('정년연장의 청년층 일자리 효과')에 따르면, '60세 정년' 도입 후 2019년까지 기간 동안 23~27세 청년층 전일제 일자리는 상용직에서 4.5%, 임금 근로 일자리에서 6.0% 감소한 것으로 추정됐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 따르면, 정년연장으로 혜택을 받게 되는 고령 근로자가 많아질수록 청년층 취업난은 더욱 악화됐고, 일자리를 둘러싼 세대 간 갈등이 격화될 가능성도 커졌다.
다만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정년이 연장돼야 할 필요성에는 다수가 공감했다.
인천에서 중소기업에 다니는 30대 임모씨는 "사회가 고령화되는데 정년은 옛날 기준에 머무른 건 맞지 않는다"며 "법적으로 일을 그만두게 하는 나이가 있다는 것이 (합리적인지) 의문이다. 나이가 많든 아니든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더 하도록 하는 것이 맞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돌아올 정년연장의 혜택을 기대하며 찬성하는 청년도 있었다. 수도권 구청에서 근무하는 최모(29)씨는 "일단 공무원에 들어온 이상 나가서 다른 일자리를 구할 생각이 없다. 그냥 안전하게 오래 다니자는 생각"이라며 "정년연장으로 연금을 받기까지 공백이 줄어 그 기간도 걱정이 없었으면 한다"고 했다.
반면 급속도로 유연화된 최근 고용형태의 특성상 정년연장이 큰 장점이 아닐 거란 시각도 있었다. 변씨는 "요즘엔 관심사에 따라 이직이 자유로울 뿐 아니라 2개 이상의 직업과 소속을 가진 '엔(n)잡러'도 흔한 만큼 정년 연장이 된다고 해서 좋은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60대 전후 "MZ우려 이해는 하지만…그 자리 뺏을 생각 없어"
연합뉴스60세를 앞뒀거나 그 나이를 지나온 세대는 정년연장의 필요를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서울의 한 오피스텔에서 시설과 주차 관리를 하는 박모(75)씨는 젊은층의 우려를 이해한다며 생각을 밝혔다.
그는 태권도 도장부터 개인 사업, 평범한 직장생활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박씨는 "젊을 땐 자식들에게 '올인'하고 은퇴하면 남는 게 없다"며 "노인 일자리는 값 싼 일자리 뿐"이라며 정년연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노령층은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인 만큼 은퇴 후 최소한의 생활 보장을 위해서라도 정년연장이 필요하단 뜻이다.
이른 퇴직을 하고 몇년 전부터 연금 81만 원으로 생활하는 서모(65)씨는 "퇴직하고 연금을 받기까지 공백기가 너무 힘들다"며 정년 연장은 '필수'라고 했다.
대학에서 미화 업무를 하는 50대 오모씨는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만이라도 정년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청년층이 정년연장을 반대하는 게 이해는 되지만 경비나 청소 분야는 젊은 사람이 많지 않아 직종별로 차이가 있는 것 같다"며 "전체적으로 다 싸잡아 '정년을 연장해주면 청년 일자리는 어쩌냐'고 그러면 가슴 아플 때가 있다"고 했다.
정년 연장만으로 빈곤 해결될까…다른 해법도 같이 고민해야
다만, 정년을 늘려도 수혜자는 적을 거란 지적과 함께 정년 연장만 해서는 노령층의 빈곤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없단 목소리도 나왔다.
취업준비생 박모(26)씨는 "노인 인구가 많아지고 노인 빈곤 문제 심각하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년연장이 논의되는 데엔 긍정적"이라며 "다만 정년이 주로 잘 지켜지는 곳은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노인 빈곤을 겪는 사람들이 그런 정책(의 혜택)을 잘 누릴 수 있을지는 사실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노인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년연장을 말하는 거라면 이를 해결할 다른 방법도 고민해야 한다"며 "또 정년이 연장되면 연금수급 시 연령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몇 세까지 올리나'에 치중된 정년 논의를 보다 다층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주은선 교수는 "연금 수급개시 연령을 늦추기 위해서라도, 중고령자의 노동시장 참여와 소득수준이 올라야 한다. 중고령자의 소득수준을 올리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사회적 기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정년연장도 여기에 포함되지만, 사실 정년제가 적용되는 기업은 20%에 불과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령자 고용률과 (청년을 포함한) 다른 연령대 고용률을 (통합적으로) 함께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 "고령층이 차지하는 일자리와 청년들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일자리가 과연 같은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완전히) 겹치지는 않는다고 본다"며 "청년층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과 (정년연장은) 다르게 봐야 한다"고 했다.
정년연장과 청년 일자리가 '제로섬 관계'가 되지 않기 위해선 유럽에서 활용된 '점진적 퇴직제'가 대안이 될 수 있단 제언도 나왔다. 하루 8시간을 꽉 채워 일하지 않고, 2~3시간씩 줄여 일하는 대신 절감한 인건비와 정부 세제혜택 등을 통해 청년인력을 고용한다는 구상이다.
일하는시민연구소 김종진 소장은 "'라이트 풀타임(light full-time)'이라 부르는데 즉, (정년이 임박한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을 줄이면, 기업들은 그에 비례해 신규 일자리를 충원할 수 있다"며 "독일처럼 점진적 은퇴 프로그램을 모색해야 한다. 정년과 연금 수급시점을 맞추는 것은 전 세계적인 흐름"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