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생산 현황 점검하는 얼티엄셀즈 직원들. LG에너지솔루션 제공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둔화)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그간 시장 선점에 몰두하던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속속 계획을 수정하고 나섰다. 공격적인 투자 대신 한발 물러서 수요 변화에 신중히 대응하겠다는 판단이다. 전기차 전환의 속도 조절이 이어지는 가운데 당분간 격전지는 하이브리드 시장으로 옮겨갈 전망이다.
토요타부터 포드까지…전기차 템포 늦추기
9일 업계에 따르면 일본 토요타 자동차는 글로벌 전기차 생산량을 당초 계획한 목표치보다 30% 축소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지난해 4월까지만 해도 토요타는 2026년까지 전기차 모델 10종을 새로 투입하고, 글로벌 생산량을 연간 150만대까지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딘 시장 성장에 이를 100만대 수준으로 감축했다.
볼보자동차는 2030년부터 모든 차종을 전기차로 바꾸겠다는 목표를 철회했다. 전기차 전환 계획을 발표한지 3년 만이다. 짐 로완 볼보자동차 최고경영자는 "전기차 전환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다른 완성차 업체들도 속도 조절에 접어들기는 마찬가지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미시간주 공장의 전기 픽업트럭 생산 일정을 또 한번 연기했다. 앞서 GM은 올해 말로 예정했던 생산 일정을 내년 말로 미뤘는데, 이번에는 2026년 중반까지 추가로 6개월 더 늦췄다. 전기차 생산량 100만대 목표도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포드는 대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개발을 취소하고, 전기차 부문 자본 지출 비율도 40%에서 30%까지 축소하기로 했다.
완성차 업체들의 이같은 속도 조절에는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가 주춤한 탓이 크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7월 전세계 80개국에 등록된 전기차는 총 854만3천대로 전년 동기보다 20.8% 늘었다. 수치만 놓고 보면 우상향이지만 속도는 뚜렷하게 둔화세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 성장률은 2021년 109.9%에서 2022년 56.9%, 지난해에는 33.5%로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그마저도 중국 전기차 업체를 제외하면 판매량은 대부분 하향 곡선이다.
연합뉴스'캐즘 극복' 대안으로 하이브리드 부상
전반적인 수요 둔화와 중국 전기차의 공세에 완성차 업체들이 꺼내든 카드는 '하이브리드차'다. 전기차가 대중화 궤도에서 멈칫한 사이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하이브리드차가 캐즘 극복의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다.
하이브리드차 시장의 '전통 강자'인 토요타가 전기차 목표치를 줄이면서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 생산을 확대하겠다고 선언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토요타는 PHEV를 중심으로 친환경차 라인업을 확대하면서 "고객이 원하는 선택지를 적시에 투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수요를 신중하게 파악하면서 유연하게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볼보도 기존 전기차 전환 계획은 철회하면서 전체 매출의 90%를 전기차와 PHEV를 합친 판매로 채우겠다고 새 목표를 세웠다.
국내에서는 현대차·기아가 하이브리드차에 주력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달 28일 열린 CEO 인베스터데이에서 현재 7개 차종에 적용되는 하이브리드차를 14종으로 늘리고, 제네시스의 경우 전기차 전용 모델을 제외한 전체 차종에 하이브리드 모델을 추가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아는 지난해 출시된 카니발 하이브리드를 포함해 △2024년 6개 차종 △2026년 8개 차종 △2028년 9개 차종 등 주요 차종 대부분에 하이브리드 모델을 운영할 계획이다.
현대차·기아가 하이브리드차에 방점을 찍었지만, 전기차 전환에는 속도 조절 없이 총력을 다한다는 방침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인베스터데이에서 제시한 '2030년 전기차 200만대 판매 목표'를 올해도 재확인했고, 기아 역시 '2030년 전기차 160만대 판매 목표'를 수정하지 않았다. 현대차는 "유연하게 시장에 대응하면서 전기차 성장 둔화기를 극복하겠다"며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전기차의 수익성을 모두 개선해 2030년에는 10% 이상 영업이익률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