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킬러스' 배우 심은경. ㈜스튜디오빌 제공※ 스포일러 주의
배우 심은경이 주는 힘은 '믿음'이다. 관객에게도, 감독에게도 믿음을 준다.
드라마 '황진이' '태왕사신기' 등을 통해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드러낸 어린 배우 심은경은 '써니'로 영화에 발 들이더니 '수상한 그녀'를 통해 독보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일찌감치 '믿고 보는 배우'에 이름을 올렸다.
국내에서 활약하던 심은경은 일본으로 넘어가 활동을 시작했고, 얼마 안 있어 '신문기자'(2019)로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새 역사를 썼다. 이후에도 심은경은 일본 영화와 드라마에 끊임없이 출연하며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그런 심은경이 오랜만에 한국 영화 '더 킬러스'를 통해 국내 관객들과 반가운 만남을 갖고 있다. 심은경의 긴 필모그래피에서도 옴니버스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특히 4편의 이야기 안에서 여러 캐릭터, 여러 방식으로 출연하며 단단하게 중심을 잡은 심은경으로 인해 '더 킬러스'는 진정한 한 편의 영화로 완성됐다.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 ㈜스튜디오빌 제공배우 인생에 전환점이 된 '더 킬러스'
'더 킬러스' 안에는 모두 4편의 서로 다른 작품이 담겼다. 김종관 감독의 '변신', 노덕 감독의 '업자들', 장항준 감독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이명세 감독의 '무성영화'. 심은경은 4편의 영화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이명세 감독의 '무성영화'다.
이명세 감독에게 제안이 왔을 때 심은경은 대본을 보기도 전에 무조건 하겠다고 결정했다. "워낙 존경하는 감독님"이었기 때문이다. '무성영화' 출연을 결정한 후 다른 감독들도 하나둘 그에게 제안을 해왔다. 심은경은 이 과정을 "어쩌다 보니 내가 다 나오게 된 것"이라며 웃었다.
심은경이 '더 킬러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영화가 가진 '실험성' 덕분이었다. 이는 그의 오래된 열망이기도 하다. 그는 "굉장히 의미가 깊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30대가 됐을 때 이 작품이 와줬다는 것"이라며 "나에게도 전환점이 되어줬고, 앞으로 배우로서의 길을 어떻게 가고자 하는 나침반이 되어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묻자 "중심을 좀 더 잡았다는 표현"이라며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하고자 하는 장르의 영화를 하면서 좀 더 다양하게 도전하는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나도 한 영화의 팬으로 그런 영화를 응원하고도 싶고, 그런 영화를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싶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 ㈜스튜디오빌 제공 '움직임'이란 배움
심은경은 감독 나름의 방식과 시각이 담긴 만큼 '더 킬러스'의 모든 작품을 다 좋아한다. 그 중 '업자들'은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 다양한 감정을 보여줄 수 있는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전적인 작품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노덕 감독을 끈질기게 붙잡고 이야기할 정도로 역할에 애정이 많았다.
가장 어렵지만,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작품은 이명세 감독의 '무성영화'였다. 대본을 보기도 전에 감독에 대한 전적인 믿음 하나로 출연을 결정한 작품이다. 그런데 막상 대본을 받아보니 쉽사리 이해가 가진 않았다.
"콘티도 있었어요. 콘티가 정말 여러 버전이 있었는데, 사실은 그걸 아무리 봐도 모르겠더라고요.(웃음) 처음 대본을 읽고, 좋은 의미로 회사 대표님께 '제가 이제 진짜 예술을 할 수 있는 거 같아요'라고 말했어요." 초반에는 여타의 다른 영화처럼 내러티브로만 이해하려다 보니 어려웠다. 대본도 거의 움직임과 움직임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이라 잘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이명세 감독에게 '무성영화'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자신이 맡은 '선샤인'은 어떤 캐릭터인지 등을 물어봤다.
그때 이 감독은 심은경에게 "은경아, 뭔가를 이해하려 들지 말고 느끼려 하면 돼. 난 영화를 볼 때 이미지만 봐. 대사는 기억 안 나는 경우도 있어. 그것만으로도 괜찮아. 어느 날 너한테 확 다가와서 이해되는 순간이 있어"라고 조언했다. 심은경은 "그 말이 나한테 위안이 되고, 힌트가 됐다"라고 했다.
영화 '더 킬러스' 스틸컷. ㈜스튜디오빌 제공'무성영화'는 그 어느 작품보다 배우의 동작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만큼 심은경은 자신의 몸짓이 어떤 식으로 영화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심은경은 "그동안 내가 움직임에 대한 것을 정말 신경을 많이 안 썼다는 걸 많이 느꼈다"라며 "배우에게 움직임은 연기함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말했다. 배우들은 몸의 유연성을 기르고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발레나 펜싱 등을 배운다. 심은경 역시 펜싱을 배운 바 있다.
이명세 감독은 심은경에게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 자크 타티 등이 출연한 무성영화 시대 영화를 참고해 보라고 조언해 줬고, 일주일간 리허설을 진행하며 동작을 몸에 익혀 나갔다.
"계속 연습해야 내 몸에 체화되고,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거잖아요. 내 것으로 만든 다음 현장에 들어가면 더 발전하는 게 생겨요. 뭔가 이런 동작도 좋을 거 같고, 이런 애드리브도 나올 수 있을 거 같다는 게 생겨나는 걸 '무성영화' 현장에서 다시금 절감했어요."영화 '더 킬러스' 배우 심은경. ㈜스튜디오빌 제공 심은경에게 '연기'란
1994년생인 심은경은 많지 않은 나이에도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아왔다. 배우로서 갈망해 온 일본 진출은 심은경에게 배우로서 잊고 있던 중요한 지점을 상기시켜 주는 계기가 됐다.
일본 진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어가 익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작품이 들어왔다. 심은경은 번역 대본을 완벽하게 숙지한 후 일본어 대본을 매일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 읽으며 달달 외웠다. 그는 "그때 했던 그런 연습들이 내가 잠깐 잊고 있던, 지난날의 연기 연습 방식을 떠올리게 해줬다"라고 했다.
어릴 때는 대본이 다 해질 정도로 반복해서 읽고 밑줄도 그으며 연습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연습을 많이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자신 안에 갖고 있다가 현장에서 터트리는 '날 것' 같은 연기를 보여주고자 한 적도 있다. 그때마다 심은경 안에는 어떤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분명 연기에 충실했지만, 왜 다른 식으로 화면에 비치는지 말이다.
"일본에서 그런 식으로 대본 연습을 해보니 '아, 이거였지!' 싶었어요. 계속 대본을 읽다 보면 전체가 보이게 되거든요. 그 전체를 바라봤어야 한 거였어요. 그래서 '아, 그렇지. 연습이 참 중요했던 거지' 한 거죠. 그렇게 연기를 준비하는 관점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고 바뀌게 된 계기가 되어 줬어요." 일본 영화 '신문기자' 속 배우 심은경. 다음 영화 제공어린 나이부터 연기를 시작해 오랜 시간을 배우로 지내왔지만, 심은경은 여전히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고 배우고 있다. 그에게 연기란 무엇이냐고 묻자 "애증 관계"라는 답이 돌아왔다.
"항상 너무 어렵고, 항상 미울 때도 많고. '그런데 왜 계속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아직 더 해야 하고, 내 안에서 해야 할 게 있고, 보여주고 싶은 게 남아 있는 거 같아요."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품에 안았음에도 심은경은 여전히 매일 생각한다. '나는 과연 배우로서 적합한 배우인가?' '내가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이대로 괜찮은 건가?'
아직도 심은경에게 연기는 광범위하고, 오히려 점점 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정말 연기라는 건 참 뭔가 지겹고, 너무 어렵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게 또 하면 내가 거기에 빠져 버리는 거다. 그게 또 너무 좋은 거다"라고 했다. 정말 그의 말마따나 '애증'이었다.
이런 애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심은경이 꾸는 또 다른 꿈은 무엇일까.
"제가 좋아하는 만화 중 일본 만화 '몬스터'가 있는데, 거기 나오는 요한 같은 역할을 언젠가 꼭 하고 싶다고 계속 내비쳐왔어요. 요한이 만화 안에서 내비치는 존재감, 메시지 등에 매료됐거든요. 그 꿈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