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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훈 "(하)승진아, 이게 우리의 숙명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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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장훈 "(하)승진아, 이게 우리의 숙명이란다"

    [임종률의 스포츠레터]팬과 선수의 예의에 대한 조언

    '승진아, 이렇게 안아주고 싶구나' KCC 하승진(왼쪽)은 지난 1일 삼성과 경기에서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에 팬의 조롱까지 듣는 아픔을 겪었다. 이에 대선배 서장훈은 애정어린 조언을 건넸다. 오른쪽 사진은 지난 2013년 서장훈이 은퇴식에서 상대 선수였던 모비스 양동근의 포옹을 받는 모습.(자료사진=KBL)

     

    매서운 한파로 시작된 2015년, 그러나 프로농구의 새해 첫날은 뜨거웠습니다. 경기도 경기였지만 코트 바깥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죠. 다름아닌 221cm KBL '최장신 센터' 하승진(30 · 전주 KCC)과 한 팬의 갈등이었습니다.

    1일 서울 삼성과 잠실 경기에서 벌어진 일은 도발과 격분, 육탄 저지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한 팬의 조롱은 뼈가 부러진 고통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고, 거인의 분노는 수 명의 건장한 안전요원도 진화하기 어려울 만큼 거셌습니다.

    가까스로 불미스러운 사태로까지 확산은 막았지만 후유증은 진하게 남았습니다. 꼭 30살이 된 아기 아빠는 서럽게 울었고, 징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심코 뱉은 말에 이런 파장까지 예상하지 못한 팬도 마녀사냥 수준의 '신상 털기'에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필이면 한 해를 시작하는 첫날, 분명 KBL에는 불행한 사건일 겁니다. 하지만 차제에 선수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 또 팬들의 관람 문화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을 겁니다. 비단 농구뿐만 아니라 한국 프로 스포츠 전반에 걸쳐 인식의 변화가 온다면 더욱 그러할 겁니다.

    저 역시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중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누구보다 더 이런 경험을 숱하게 해왔을 인물입니다. 더욱이 이번 일로 인해 충격이 컸을 하승진은 물론 해당 팬, 더 나아가 한국 농구 전체를 위해 더없이 훌륭한 조언을 해줄 적임자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2일 밤 통화가 됐습니다.

    ▲"하승진, 지켜줘야 할 韓 농구 축복"

    그 주인공은 '국보급 센터' 서장훈(41). 20년 세월 한국 농구의 중심이었던 인물입니다. 그라면 이번 사건에 대해 의미 있는 말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선수와 팬의 경계,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어렵게 화두를 꺼냈습니다. 서장훈도 조심스러웠지만 후배와 한국 농구 전체를 위해 흔쾌히 말문을 열었습니다.

    서장훈은 누구보다 하승진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운을 뗐습니다. 그보다 백배는 더 같은 경험을 했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팬들의 조롱과 멸시, 비아냥, 욕설은 연세대 시절부터 겪어왔다"면서 서장훈은 "어떤 때는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빠져나가는데 관중석에서 동전이 날아오기도 했다"며 아픈 기억을 털어놨습니다.

    1993년 대학 입학 때부터 서장훈은 괴물이었습니다. 207cm 최장신 센터로 아마추어 농구를 평정했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이끌었으며 프로에 와서도 우승 청부사로 불렸습니다. 다른 팀 선수들에게는 넘어설 수 없는 거탑이었고, 팬들에게는 너무나도 미운 존재였습니다. 당연히 상대 거센 견제와 야유가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긴 크구나' 지난 2009년 플레이오프에서 당시 전자랜드 소속이던 서장훈이 하승진과 맞붙었던 모습.(자료사진=KBL)

     

    그런 서장훈인 만큼 하승진을 동병상련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승진 역시 서장훈 못지 않은 조명을 받으며 나타났습니다. 삼일상고 시절부터 한국 농구의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킬 기린아로 기대를 모았고, 미국 프로농구(NBA)까지 진출했습니다. 한국 무대에서도 역시 우승 보증수표임을 입증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서장훈과 하승진은 같은 아픔을 경험한 셈입니다.

    더욱이 둘은 대학 선후배이자 KCC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던 사이. 이후 서장훈이 트레이드되면서 애증이 섞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서장훈은 "우리는 하승진을 아껴주고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 농구계에 내려진 축복과도 같은 선수를 망쳐서야 되겠냐는 겁니다. 서장훈은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신체 조건을 가진 승진이가 이런 식으로 고통받게 할 수는 없다"면서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승진아, 그래도 우리는 선수 아니냐"

    하승진을 두둔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성숙한 자세를 따뜻하게, 그러나 따끔하게 요구했습니다.

    서장훈은 "물론 승진이가 처한 상황이 힘들다는 것은 십분 이해한다"고 전제했습니다. 팀의 중심으로 팀의 연패를 끊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가뜩이나 부상에서 나아져 복귀전을 치르는 당일 겪은 혹독한 경험이라는 겁니다. 서장훈은 "이전 대표팀을 고사할 때도 부상 논란이 있었기에 더 예민해져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는 충고에 더 힘을 주었습니다. 서장훈은 "팬들이 어떤 얘기를 하든지 선수는 무심하게 넘겨야 한다"면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체득한 우리의 숙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더욱이 언제나 집중 수비와 질시를 당하는 특급 선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자신도 도를 넘은 팬들의 공세에 발끈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선수의 책임과 사명감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선수는 팬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 코트에서 다른 팀 경쟁자들과 대결하는 게 본분이고 우선이라는 겁니다. 서장훈은 "우리나라나 농구계뿐만이 아니고 축구든, NBA든 다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더 큰 선수로 나아가기 위한 시련일 수도 있습니다. 서장훈은 "승진이도 30살이 넘었고 애도 있는 어느덧 베테랑"이라면서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웃어넘길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애정어린 조언을 건넸습니다.

    '저 팬들한테 잘해줍니다' KCC 하승진이 경기 후 경기장을 빠져나오면서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 KCC 팬이 홈페이지에 올린 사진이다.(자료사진=KCC)

     

    사실 이번 사건에 대한 결론은 누구든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팬이 부상을 당한 선수에게 인간적으로 참기 힘든 말을 무심코 내뱉었고, 가뜩이나 아팠던 하승진이 이성을 잃은 상황. 보다 성숙한 팬 문화가 이뤄져야 하고, 선수는 팬이 있기에 존재한다는 대명제를 더 명심해야 한다는 답일 겁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당사자로서 그런 상황을 많이 겪었을 서장훈이라면 그 의미는 다르게, 더 깊은 울림을 주면서 다가올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은퇴한 지 두 시즌째를 맞은 가운데 농구계를 잠시 떠나 있는 서장훈이 어렵게 말문을 연 이유일 겁니다. 고액연봉자의 화려한 조명 뒤에 숨은 감정노동자라는 선수의 어두운 그늘입니다.

    p.s-서장훈은 최근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하며 방송인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습니다. 현역 시절 우승 청부사로 불렸듯이 시청률 보증수표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송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농구와 완전히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닙니다. 인터뷰 말미에 서장훈은 "언젠가 농구계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승진 사태에 대해 적잖은 시간 인터뷰를 했던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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