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시절 제정된 유신헌법 53조 긴급조치 1,2,9호에 대해 피해자 오모씨 등이 낸 헌법소원이 헌재 재판관 전원일치 위헌판정 결정을 받았다. (사진=자료사진)
1970년대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학내 시위를 벌이다 긴급조치 1호·9호 위반으로 구금됐던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첫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20부(양현주 부장판사)는 유신정권 시절 인하대 재학생이었던 박모씨 등 13명과 그 가족들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는 12억 4,296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고 14일 밝혔다.
박 씨 등 2명은 1978년 11월 인하대에서 열린 학도호국단 사열식에서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는 유인물 1,000장을 만들어 배포했다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 받은 후 상급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같은 인하대생이었던 김모씨 등 3명은 같은 해 9월 유신철폐 유인물을 작성·배포하고 시위를 선동하는 등 긴급조치 9호를 어겼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살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됐다.
원고 가운데 안모씨 등 2명은 서강대에 재학 중이던 1974년 3월 학내에서 유신헌법 및 긴급조치 철폐를 위한 시위를 주도했다가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은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김지하 시인이 투옥 중 외부로 내보낸 양심선언문을 인쇄해 서울대와 이화여대 등에 뿌렸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된 일명 '김지하 양심선언문 사건'의 주인공인 조모씨 등 5명은 각각 징역 1년~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중 송모씨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형기를 마칠 때까지 372일 동안이나 구금됐다.
서슬 퍼렇던 유신정권 시절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대학생들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13년에서야 무죄를 선고한 재심 판결을 통해 억울함을 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대통령의 위헌적 긴급조치 발동과 위법한 수사, 재판, 구금 등으로 인한 피해를 배상하라"며 같은 해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긴급조치에 '면죄부'를 준 대법원의 판결이 걸림돌이었다. 대법원은 2014년 10월 긴급조치 9호 피해자 손해배상 사건에서 "긴급조치로 인한 복역은 국가기관의 불법행위가 아니며, 공무원의 위법행위로 유죄를 받았음이 입증돼야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놨다.
대법원은 한 술 더 떠 지난해 3월 "긴급조치 9호가 사후에 위헌·무효로 선언됐더라도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법적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고 판결했다. 긴급조치는 '위헌·무효'라고 선언했던 2013년 대법원의 판결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대법원이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배상을 제한하려는 논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억지를 부렸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실제로 하급심들은 대법원 판례에 따라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를 기각하기 시작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조영선 변호사는 "하급심이 대법원 판례를 깨고 긴급조치의 위법성을 인정해 배상을 명한 사건은 단 두 건에 불과했는데 항소심에서 뒤집혔다"며 "긴급조치 관련 소송은 시효가 끝났다는 이유로 거의 기각된다"고 말했다.
(사진=유튜브 영상 캡처)
박 씨 등의 경우는 긴급조치 사건과 관련해 국가의 배상 책임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첫 항소심 판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재판부가 긴급조치가 불법이 아니라는 대법원 판례를 그대로 준용했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고문과 가혹행위로 인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거나 불리한 진술을 한 것으로 보여 증거능력이 없고, 압수물도 증명력이 부족해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어 "형사소송법상 무죄 이유가 있었음에 관해 고도의 개연성이 있는 증명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으므로, 수사 과정상 위법행위는 유죄판결로 복역한 원고들의 손해와 인과관계가 있고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앞서 1심 재판부는 같은 판단을 내리면서 긴급조치의 위법성을 우회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국가기관이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 국민의 기본권을 중대하게 침해했다는 점에서 위법성이 매우 크고,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 받으면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혀 사회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판시한 것.{RELNEWS:right}
재판부는 또 "원고들이 석방 후 끊임없는 감시 대상이 됐고, 그로 인해 군 생활에서 고초를 겪고 취업 등 경제활동에도 어려움을 겪었다"며 "가족과 친척들도 수사기관의 감시 등으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배상 이유를 설명했다.
여기에는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인식하면서도 긴급조치를 정당화한 대법원 판례를 따라야만 하는 하급심 법관들의 고충이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에 저항하면서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지적하는 것으로 보여진다"며 "이번 판결은 긴급조치 사건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부인하는 판결들이 잇따르는 와중에 그나마 예외적인 구조를 통해 인정했다는 점에서 전향적인 판결"이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