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경. 연합뉴스식당에서 대화를 몰래 녹음·녹화하기 위해 주인 몰래 녹음기 등 장치를 설치했더라도 식당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나 소란이 빚어지지 않았다면 주거침입죄가 아니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지난 1997년 대법원은 식당에 도청장치를 설치해 녹음한 대화를 언론에 폭로한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에 대해서는 주거침입이라고 판결했는데, 사실상 같은 사안에 대한 판례가 25년 만에 바뀐 셈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4일 주거침입 혐의로 기소된 A씨 등에 대한 상고심에서 검찰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법원에 따르면 전남 광양에 있는 한 운송업체 직원 A씨와 B씨는 지난 2015년 회사에 비판적인 기사를 쓴 언론사 기자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한 뒤 식당 주인 몰래 방 안에 녹음·녹화 장치를 설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이들은 기자가 향응을 제공받고 부적절한 요구를 하는 장면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장치를 설치했다.
두 사람이 녹음기를 설치할 것을 식당 주인이 미리 알았다면 출입을 막았을 것인지, 만일 그럴 가능성이 인정되더라도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는지가 주요 쟁점이었다.
1·2심 판단은 엇갈렸다. 1심 재판부는 '초원복집 사건'의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 두 사람 혐의가 유죄라고 보고 각각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심은 통신비밀보호법이 금지하는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의 대화를 녹음한 행위를 불법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식당 방 안에 들어간 행위 만으로 관리자(주인) 의사에 반했다고 볼 수 없어 주거침입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런 2심 판단에 잘못이 없다고 봤다. 대법원 재판부는 "두 사람의 계획을 주인이 미리 알았을 경우 출입을 막았을 것으로 예상되더라도, 식당에 들어간 행위 자체가 주인의 평온을 침해했다고 볼 수는 없다"라며 주거침입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이런 다수의견에 대법관 11명이 동의했다. 식당에 들어간 실제 목적보다 들어가는 과정에서 표면적인 소란이나 충돌이 빚어졌는지 여부가 주거침입죄를 판단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해 9월 불륜 상대의 허락을 받았다면 불륜 상대의 배우자 집에 몰래 들어갔더라도 주거침입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었다. 당시에도 대법원은 "거주자의 승낙을 받아 통상적인 방법으로 집에 들어갔다면 '평온을 침해한 것'이 아니므로 침입행위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판시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도 사실상의 평온 상태가 침해되었는지가 주거침입죄 성립 여부를 따진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다만 김재형·안철상 대법관은 다른 해석을 내놨다. 이들은 별개의견에서 "사실상의 평온상태를 해친다는 의미는 추상적이고 불명확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주거침입죄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거주자 의사에 반하는지다"라고 주장했다. 물리적인 충돌이 빚어졌는지 여부보다 거주자의 허락을 받아 들어갔는지 여부가 유무죄 판단의 기준이 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별개의견은 다수의견과 결론이 같지만 판단 근거가 다른 경우다.
이날 선고로 '초원복집 사건' 판례는 1997년 대법원 선고 이후 25년 만에 바뀌었다.
지난 1992년 14대 대선 막바지에 김기춘 당시 법무장관 등 여권 인사들이 부산 초원복집에 모여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공모한 대화가 상대당 후보 측 관계자의 도청으로 세간에 알려지면서 사건이 터졌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도청에 관여한 3명을 주거침입 혐의로 기소했고, 대법원은 1997년 이들의 벌금형을 확정하면서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해 들어갔다면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