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외비'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포일러 주의
영화 '악인전'으로 칸까지 사로잡았던 이원태 감독이 이번엔 정치판이라는 또 다른 싸움터를 배경으로 한 '대외비'로 돌아왔다. '대외비'는 누아르의 색채를 띤 정치 범죄영화로, 누가 더 더러운지를 다투며 정치의 이면을 가감 없이 그려낸다.
1992년 부산, 밑바닥 정치 인생을 끝내고 싶은 만년 국회의원 후보 전해웅(조진웅)은 이번 선거에서만큼은 금배지를 달 것이라 확신했지만 정치판을 뒤흔드는 권력 실세 권순태(이성민)에게 버림받으며 지역구 공천에서 탈락한다.
권순태에 의해 짜인 선거판을 뒤집기 위해 부산 지역 재개발 계획이 담긴 대외비 문서를 입수한 전해웅은 행동파 조폭 김필도(김무열)를 통해 선거 자금까지 마련해 무소속으로 선거판에 뛰어들어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권순태 역시 전해웅이 가진 대외비 문서의 존재를 알게 되고, 점차 전해웅의 숨통을 조여 온다.
'악인전'으로 범죄액션 장르를 성공적으로 선보인 이원태 감독이 이번엔 자신의 주특기에 정치판을 가져와 또 다른 범죄드라마를 만들었다. 만년 국회의원 후보 해웅과 정치판의 숨은 실세 순태, 행동파 조폭 필도가 대한민국을 뒤흔들 비밀문서를 손에 쥐고 판을 뒤집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쟁탈전을 그린다.
영화 '대외비'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92년은 14대 대선과 총선이 동시에 일어난 해다. 영화에도 자료 화면으로 등장하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역사상 가장 깨끗하고 공명정대한 선거"를 외쳤지만, 영화는 정치란 절대 깨끗할 수 없고 결코 공명정대할 수 없는 비열한 전쟁터임을 보여준다.
1992년이라는 시대는 실제로도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이 있을 정도로 정치판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보여준 해라는 점에서 영화의 배경은 의미심장하다. 심지어 권력을 쫓는 사람들이라면 줄지어 찾는 정치판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 브로커 권순태의 공간의 이름도 '초원식당'이다.
대선 1주일을 앞둔 1992년 12월 11일, 당시 노태우 정부의 법무부 장관과 부산 기관장들이 부산시 남구 대연3동에 위치한 초원복집에 모여 민주자유당 대선 후보였던 김영삼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자고 모의했다.
이와 더불어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 김대중 민주당 후보 등 야당 후보들을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시키자는 둥 관권 선거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것이 대화를 도청한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측의 폭로로 드러났다. 이후 "권력은 복국집에서 나온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사건이 불러온 후폭풍은 상당했다.
영화는 해운대를 배경으로 해운대 택지 개발 이슈를 둘러싼 민심 잡기와 기득권 잇속 채우기를 위한 정치인과 행정 관료들의 더러운 협잡을 보여준다. 기득권은 각자의 이익과 욕망을 위해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일할 수 있는 인물을 골라 선거관리위원회 직원 매수 등을 비롯한 여러 조작을 통해 선거에 당선시킨다.
영화 '대외비'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정치를 하면 멀쩡하던 사람도 변한다는 말이 현실에서도 종종 나오는 것처럼 전해웅 역시 이런저런 사연이 있지만 결국 그는 욕망에 굴복한다. 그것이 금배지를 다는 것이든 권순태에게 복수하는 것이든 말이다. 전해웅이 더 커다란 악(惡)인 권순태와 그 뒤에 숨은 권력자들에 맞서 나가는 과정은, 점차 악과 악의 대결로 치닫는다. 악을 이기기 위해 눈이 멀어 양심과 도덕을 저버리는 전해웅의 모습은 인간에겐 성악설이 좀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대외비'가 보여주는 정치판 속 전쟁은 누가 더 '더럽냐' 혹은 누가 더 '나쁘냐'의 대결이다. 권력을 쥐려면 영혼을 팔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미 타락한 영혼이 정치권력을 쥐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정치판의 민낯은 어둠 그 자체다. 전해웅 역시 한 발짝 걸친 후에는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극 중 조폭인 김필도보다 더 비열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그려지는 게 정치인과 정치판을 뒤흔드는 기득권이다. 그들이 하는 일이 사실상 조폭과 다르지 않은데, 겉으로는 안 그런 척 가식으로 무장한 모습이 더 소름 끼치게 다가온다.
이처럼 점잖은 듯 자기 욕망을 실현하려는 사람, 간절한 듯 자기 욕망을 실현하려는 사람, 거침없이 자기 욕망을 실현하려는 사람 등 각자의 욕망을 각자의 방식대로 실현하려는 이들의 모임이다 보니 그저 안 그런 척 위선을 떠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영화 '대외비'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1992년 정치판을 다룬 '대외비'의 가장 큰 라이벌은 어쩌면 이미 한 편의 정치 막장극을 보여주고 있는 작금의 상황인지도 모른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외치며 국민의 삶을 버겁게 만드는 정치인들, 자신들의 욕망만을 위해 달려나가는 현실 정치판은 1992년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다이내믹하다. 그 안에서 '권력욕'을 드러내는 이들의 모습과 말로 역시 반복적으로 목격했다.
'대외비'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치판을 빌려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하지만, 외형적인 모습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미 정치의 속성과 이면, 그리고 그 판에 뛰어든 사람들의 민낯을 잘 아는 국민이 대부분이다. '대외비'라고 하지만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의 반복, 관객들이 가진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와 피로도 역시 '대외비'가 넘어야 한다.
여기에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강남 1970' '내부자들' 등의 영화는 물론 감독의 전작 '악인전'의 요소요소를 떠올릴 수 있다 보니, 기존 작품들의 기시감을 뛰어넘어 관객들의 눈앞에 다가가는 것 역시 이 영화의 또 다른 과제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믿고 보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만큼 걱정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다. 각 캐릭터와 그들이 만든 상황에 더욱 환멸이 날 정도로 그들의 연기가 뛰어나서 몰입이 높다.
115분 상영, 3월 1일 개봉, 15세 관람가.
영화 '대외비' 포스터.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