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사령부를 방문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합뉴스"남북회담에 나갈 때 제가 사전에 들은 제1의 가이드 라인이 바로 호칭문제였습니다. 회담에서 '북한'이라는 호칭을 쓰면 북한이 강하게 반발하니 유의해야한다는 것이었죠. 역으로 북한이 우리에게 '남조선'이라고 불러도 안 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북한에 북측, 북한은 우리에 남측이라고 호칭합니다. (국호인 한국과 조선이 아니라) 남측과 북측이 회담에서 통용된 호칭였습니다"(홍용표 전 통일부 장관)
김정은이 마침내 《대한민국》호칭을 사용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달 27일 해군사령부 방문 연설에서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 대해 "미국과 일본, 《대한민국》깡패우두머리들이 모여앉아 3자 사이의 각종 합동군사연습을 정기화한다는 것을 공표하고 그 실행에 착수했다"고 비난하며, 최고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호칭을 사용했다.
김 위원장은 이틀 뒤인 29일 '남반부의 전 영토 점령'을 목표로 하는 총참모부 전군지휘훈련의 지휘소를 방문해서도 "미국과 《대한민국》군부깡패들의 분주한 군사적 움직임과 빈번히 행해지는 확대된 각이한 군사연습들은 놈들의 반공화국 침략기도의 여지없는 폭로"라면서, 또 이 호칭을 썼다.
김여정 부부장이 지난 7월 10일 대외매체인 조선중앙통신 담화에서 쓴 《대한민국》 호칭을 강순남 국방상의 7.27 '전승절' 연설을 거쳐 김 위원장도 사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대한민국》 호칭을 쓴 적이 없다. 김정은의 연설과 발언은 노동신문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도 보도됐다.
북한에서 한국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호칭은 '남조선'이다. 남한을 미제의 식민지 정도로 보는 북한인만큼, 대한민국 국가를 인정하는 '국호'는 쓸 수 없는 용어였다. 그러나 아주 예외적으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호칭을 쓰는 경우가 있었다.
먼저 '대한민국' 호칭은 국제회담, 남북회담, 남북합의와 관련해 사용했다. 멀리로는 7.27정전협정의 후속조치를 논의하는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으로까지 올라간다. 이 때 북한의 남일 외상이 평화협정의 맥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남북공동선언, 2018년 4.27 판문점 남북공동선언, 9.19 평양 남북공동선언의 서명, 이에 대한 북한의 보도 과정에서'대한민국 대통령' 등이 공식적으로 사용됐다.
이는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규정한 대로 남북의 관계를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 관계"로 보면서도, 합의문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서로의 국호와 직함 등을 인정해 사용하는 이중성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국가로 공식 인정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대한민국》 호칭은 대부분 남한에 대한 비난과 조롱, 적대감을 표출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됐다.
통일부에 따르면 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 노동신문에서는 모두 16개의 기사(성명·보도·대답·질문장 등)에서 《대한민국》 또는 《~대한민국~》의 호칭이 사용됐는데, 이중 2013년 1월 14일 '조선민민주의공화국 외무성 비망록'을 인용한 기사를 제외하고 모두가 남한을 비난하는 맥락으로 사용됐다.
특히 지난 2014년 5월 14일의 보도에는 대한민국 호칭에 대한 북한의 부정적인 인식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박종민 기자"우리는 원래 사대와 매국을 일삼던 탓에 렬강들의 각축전장으로 란도질당하며 쇠퇴몰락하던 조선봉건왕조시대말기 국호를 그대로 본따 《대한민국》이라고 한 남조선을 단 한번도 주권국가의 체모를 갖춘 정상적인 나라로 인정해본적이 없다. (…) 우리는 이미 신성한 내 나라의 한 부분인 남조선땅은 있어야 하지만 거기에서 거짓과 위선으로 체질화되여 살고있는자들, 사대와 굴종이 골수에 밴 괴뢰들 무리만은 단 한놈도 살아남게 해서는 안된다고 단정한지 오래이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중대보도, '극악무도한 박근혜 불망종들과 판가리결산을 할 것이다' 중 발췌) 《대한민국》이 조선봉건왕조 말기의 국호를 본 딴 것이라고 폄훼하면서, 정상적인 주권국가로 한 번도 인정해 본적이 없고, 남조선 땅은 필요하지만 그 안의 괴뢰들은 처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 또는 《~대한민국~》의 호칭이 이처럼 북한 노동신문에서 남한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표현하는 호칭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2012년 이후 2023년 8월까지 겨우 16개 기사(최근 강순남 국방상의 연설,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 및 보도, 총참모부 보도 등을 제외하면 겨우 12개 기사)에서 사용됐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른바'나 '소위'를 뜻하는 겹 화살괄호 《》로 부정적 의미를 담는다고 해도 '대한민국' 호칭은 북한 주민들이 보는 노동신문에서 쉽게 쓸 수 없는 용어였던 셈이다.
북한은 '남조선 괴뢰', '남조선 역적패당' 등에서처럼 '남조선'으로도 얼마든지 적대감을 표현할 수 있고 실제 그렇게 해왔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이 최근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 등을 겨냥해 《대한민국》을 공개적으로 사용한 것은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남한을 단순히 조롱하거나 적대감을 표현하는 수준을 넘어 큰 정책 방향에서 남북관계를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가 아니라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설정하는 흐름이라는 분석이다.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대한민국》 공개호칭은 북한 주민들의 국가정체성 강화만이 아니라 '남조선'도 자연스럽게 국가로 인식시키는 효과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민족내부의 특수관계로 보면서도 서로에 대해 국호를 사용하는 기존의 이중구도에서 후자, 즉 '국가'를 강화하는 방향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평화공존의 2국가보다는 대한민국을 적대국가로 상정하는 2국가적 전략행보에 더 가깝다.
북한 미사일 발사. 연합뉴스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과 미국을 향한 북한의 핵·미사일 실전화가 이뤄지면서 같은 민족에게 핵을 사용한다는 자기모순,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논리와 모순이 발생했다"며, "국가 대 국가의 구도를 설정할 경우 같은 민족이 아니라 자신을 적대하는 국가에게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자기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사실 김정은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국가성을 강화해왔다. 국화·국수·국견 등 각종 국가 상징물 제정하는가 하면, 지난 2015년 8월 15일에는 '평양 표준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2017년 핵 무력 완성 선언 후에는 '우리국가제일주의'를 제시했다. 핵을 보유한 전략 국가로 한미일의 공격을 억제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정체성이 최근 '북한 국가론'의 핵심 요소인 셈이다.
다만 북한이 민족보다 국가를 강조하는 것이 현 단계 남북의 국력구조에서 오히려 '약함'을 반증한다는 분석도 있다. 북한이 한국에 비해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민족이 아니라 국가를 강조함으로서 생존 범위를 넓히려 한다는 것이다.
김천식 통일연구원장은 "지난 7,80년대 한국이 남북의 유엔 동시가입을 지속적으로 제기한 것은 당시 상대적으로 북한에 비해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분단의 제도화를 통해 국가의 생존 가능성을 높인 것"이라며, "최근 북한이 민족 보다 국가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측면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이 2국가 전략행보를 보인다고 해서 통일을 포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논리를 포기하는 것은 김정은의 권력 정당성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최근 해군사령부 방문연설에서 한미일 정상들을 '깡패우두머리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조국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혁명전쟁준비"를 언급하기도 했다. 다만 김정은의 통일 언급은 실제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레토릭' 차원이라는 반론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