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헤레틱' 스틸컷. ㈜이놀미디어, 롯데컬처웍스㈜롯데시네마 제공때로 영화의 러닝타임은 영화관을 나선 후에도 이어집니다. 때로 영화는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비로소 시작합니다. '영화관'은 영화 속 여러 의미와 메시지를 톺아보고, 영화관을 나선 관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스포일러 주의
전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사이자 '유전' '미드소마' '톡 투 미' 등을 통해 호러 명가로 자리매김한 A24 그리고 특유의 웃음과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을 통해 로맨스 장인으로 불리는 휴 그랜트의 만남은 옳았다. 종교적인 담론까지 끌어오며 머리와 심장을 동시에 긴장과 공포로 물들인 '헤레틱'은 A24와 휴 그랜트의 진가를 재증명하고, 가능성을 확장했다.
외딴집을 찾은 신앙심 깊은 두 소녀에게 집주인은 믿음을 뒤흔드는 이야기를 꺼낸다. 무언가 의심스럽다고 느끼는 순간, 두 소녀는 꼼짝없이 집안에 갇히게 된다. 친절했던 남자는 돌변하고, 그녀들은 살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한다.
'유전' '미드소마' '톡 투 미' 등 매번 새로운 공포로 전 세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A24가 이번엔 휴 그랜트와 '콰이어트 플레이스' 각본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듀오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감독과 함께 '헤레틱'(Heretic·이단자, 이교도)을 선보였다.
외화 '헤레틱' 스틸컷. ㈜이놀미디어, 롯데컬처웍스㈜롯데시네마 제공제목처럼 영화는 종교적인 담론을 꺼내며 '믿음'의 본질을 다룬다. '믿음'을 건드는 영화인 '헤레틱'이 긴장과 공포를 자아내는 방식 역시 심리 게임처럼 진행된다. 종교에 관한 교리와 본질, 믿음에 관한 지적인 이야기와 토론이 오가는 만큼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 긴장이 동시에 생겨난다.
'헤레틱'은 크게 리드(휴 그랜트)의 거실, 예배당처럼 보이는 서재, 지하 공간으로 옮겨가며 이야기가 진행되며 분위기도 미스터리 심리 스릴러에서 피가 흐르는 호러로 변화한다. 그만큼 리드의 집이라는 공간은 '헤레틱'의 주연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리드의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사실상 세 명의 인물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그런 만큼 한정된 요소들을 사용해 긴장과 공포를 어떻게 다르게 끌어낼 것인가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영화가 채택한 것이 바로 '종교'적인 질문이다.
초반부는 종교와 믿음에 관한 철학적인 담론으로 이어진다. 유일한 참된 종교란 무엇인가, 진짜 믿을 수 있는 교리란 무엇인가 등 인류가 오랜 시간 품어왔던 질문과 의문을 리드의 입을 통해 쏟아낸다.
외화 '헤레틱' 스틸컷. ㈜이놀미디어, 롯데컬처웍스㈜롯데시네마 제공재밌는 건 리드가 모노폴리라는 게임을 이용해 종교를 설명한다는 점이다. 가장 최초의 원형이 된 게임과 이를 변형해 생겨난 모노폴리, 그리고 여러 버전으로 나온 모노폴리를 성서와 비교하는 것이다. 뿌리가 되는 유대교로부터 기독교, 이슬람교,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모르몬교) 등 변형된 유대교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세계에 여러 신화와 종교를 끌어들이는 등 제법 흥미로운 주제를 논리와 궤변을 섞어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관객들을 긴 대화에 빠져들게 만든다.
자신들의 종교를 선교하러 갔던 반스(소피 대처)와 팩스턴(클로이 이스트)는 반대로 리드의 설교를 통해 믿음을 시험당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질문이지만 관객들 역시 머리로는 자신만의 종교와 믿음을 시험하고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질문과 의문으로 관객을 리드의 게임에 엮는다.
말한 것처럼 이것은 모두 일종의 '게임'이다. 두 여성이 가진 종교에 대한 믿음을 뒤흔든 리드는 두 사람에게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강요한다. 종교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반스와 팩스턴이 선교를 위해 리드의 집을 찾은 순간부터 믿음의 본질에 관한 리드의 시험, 즉 게임은 시작했다.
외화 '헤레틱' 스틸컷. ㈜이놀미디어, 롯데컬처웍스㈜롯데시네마 제공두 사람은 리드의 말만 듣고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할 거라 믿는다. 그러나 애초에 리드가 말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때부터 두 사람은 물론 관객까지 과연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 것인지 의심을 품고 리드를 대하게 된다. '헤레틱'에서 의심은 곧 '공포'다.
그런 리드가 종교와 신앙을 뒤흔드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다음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할 때, '믿음'조차 '불신'할 수밖에 없게 된다. 더 이상 우리를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 불신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믿음의 본질을 건드는 방식이다.
이는 리드의 말마따나 '통제'의 과정이다. 리드는 스스로 종교의 신처럼 반스와 팩스턴의 종교를 변형하고 믿음을 흔들며 통제하려 한다. 이 과정은 마치 맨스플레인과 같다. 리드는 맨스플레인을 통해 두 여성을 정신적, 물리적으로 통제한 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게임을 진행한다. 그러나 결국 리드가 흔들려고 했던 믿음도, 그가 행하려고 했던 통제를 두 여성은 벗어났다는 점은 여러모로 의미 있게 다가온다.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는 영화인 만큼 '헤레틱' 안에서 종교적인 상징도 여러 가지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반스가 리드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각목에 박힌 못의 개수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사용한 못의 개수는 3개다. 이처럼 종교적인 상징들이 영화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찾아보는 것 또한 '헤레틱'의 재미 중 하나다.
또한 영화의 결말도 영화관을 나온 후 이야기해 볼만하다. 영화에서는 장자의 '호접지몽'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영화의 엔딩에 접목해 생각해 본다면 흥미로운 토론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영화는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된다. 그런 만큼 단조롭다고 느낄 수 있는데, 정정훈 촬영감독이 특유의 스타일로 한정된 공간을 두렵고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로 채워 넣었다. 그가 왜 할리우드 감독들의 사랑을 받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외화 '헤레틱' 스틸컷. ㈜이놀미디어, 롯데컬처웍스㈜롯데시네마 제공뭐니 뭐니 해도 '헤레틱'의 일등 공신은 휴 그랜트다. 휴 그랜트가 연기한 리드는 차분해서 오히려 더 무서운 캐릭터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매력이 오히려 영화에서 긴장과 공포를 자아내는 요소가 됐다. '헤레틱'을 보고 나면 휴 그랜트의 다른 영화들과 블루베리 파이를 마냥 이전처럼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 작품에서 그는 강렬한 존재감을 선보였고, 이런 모습을 더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 최근 개봉한 '컴패니언'에 이어 '헤레틱'으로 다시금 국내 관객들과 만난 반스 역 소피 대처는 이번 영화를 통해 다시금 주목해야 할 배우임을 증명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던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감독 듀오는 '헤레틱'을 통해 자신들은 물론 A24의 공포가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며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들이 다음에 또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릴지 기대된다.
111분 상영, 4월 2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외화 '헤레틱' 포스터. ㈜이놀미디어, 롯데컬처웍스㈜롯데시네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