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적을 반납하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렵니다"
북한을 탈출해 11년 동안 서울에서 생활해 온 한 탈북자의 충격고백이다.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 살고 있는 손모(49) 씨는 기자와 만나 그동안의 서울 생활을 설명하면서 북한에 다시 입북하려는 의도를 소상히 설명했다.
그가 북한을 떠나게 된 동기는 이렇다.
북한 당 간부의 아들인 그는 평양경제대학을 졸업한 뒤 국가기관 몇 군데를 거쳐 탈북 당시에는 북한 국가체육위원회 산하 류경합영회사 소속으로 부인, 아들과 함께 평양 중심지에 살면서 나름대로 행복한 생활을 했다.
1996년 1월 초 어느날, 회사 과장집에 모여 신년 회식을 하면서 외국 비디오를 보던 중 "미국무기가 발달됐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돼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누군가의 밀고로 국가안전보위부의 오랜 조사끝에 결백하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동료 6명과 함께 강제 퇴직을 당했다. 그의 추락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근무하던 회사 간부로부터 복직을 조건으로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자'는 제의를 받고 외국인과 전략물자를 거래하기 위해 받은 1만 달러를 군 연구소 간부에게 사기 당한 뒤 또다시 보위부로부터 조사를 받는다.
고생 끝에 주위의 도움으로 병보석으로 석방됐지만, 함경북도 영광군 관리소로 추방된다는 사실을 알고 1998년 1월 함경북도 회령을 통해 가족들을 남겨두고 단신으로 두만강을 넘었다.
중국에서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조선족 친척들의 도움으로 연변, 청도, 상해 등지에서 4년동안 지내다 2002년 8월 3일 베이징 한국총영사관에 진입해 그리던 자유 대한의 품에 안겼다.
북한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남한에서의 경력도 다른 탈북자들에 비해 비교적 화려하다.
입국 초기에는 카센터 기술자, 호텔 주차 안내원을 거쳐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정책실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북한 인권운동에 나선다.
2006년에는 황장엽 씨가 주도한 북한민주화위원회 창립을 도와 사무국장으로 3년을 역임하고, 이어 탈북민단체총연합 사무국장으로 3년을 지냈다. 지금도 모 탈북자 지원단체 대표로 탈북자들을 돕고 있다.
손 씨는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북한에 재입북하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손 씨의 친형은 중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지난 2009년 북한에서 총살당한 손정남씨다.
북한 미사일연구소 연구원이었던 손정남 씨가 북한에 강제 송환되자 미국과 유럽의회와 인권단체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당시 미하원 톰랜드슨 외교위원장은 박길연 유엔주재 북한 대사에 서한을 보내고 유럽의회에서는 스웨덴 특사까지 북한에 보내 구명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북한인권을 거론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마디도 안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마음이 많이 상했다고 했다.
또 다른 이유는 2009년 탈북민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 당시, 중국에서 연락온 한 탈북여성을 돕기 위해 탈북 중개인에게 써준 850만 원 차용증 때문이다.
그의 도움으로 무사히 입국한 탈북여성은 자궁암으로 수술을 받고 탈북비용은 결국 그가 떠안게 됐다.
결국 2010년 법정소송으로 번지면서 지난해 9월에는 아파트 가재도구와 보증금까지 압류됐다. 탈북민을 도우려다 낭패를 당한 그는 "법원 판결도 공정하지 않다"며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는 또 "북한인권운동을 하면서 느낀 점은 북한인권이 특정 정파를 대변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북한 동포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RELNEWS:right}북한에는 현재 70살이 넘은 노모가 있다.
자식 한 명은 하늘나라로 보내고 또 한 명은 남한에 떠나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인다고 말했다.
자식으로 재입북해 마지막으로 효도를 하고 싶다며 자신도 지금 간경화 말기와 신경장애가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 3살때 중국으로 탈북시켜 키운 고등학생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정말 11년의 남한 생활을 접고 사랑하는 아들을 남겨 둔채 북한으로 돌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