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사상 서동욱 에세이
철학자이면서 시인,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서동욱이 신간 '생활의 사상'을 펴냈다. 에세이라는 형식을 빌려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풀어낸 글 75편을 인문학, 예술, 사회, 삶이라는 네 가지 좌표 아래 모았다. 글들은 제각기 생명력을 지니고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지만, 마지막에 다다르는 곳은 우리의 생활이다. 따라서 이 책은 생활이 된 사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1부는 인문학을 주제로 한다. 스피노자와 진주 귀걸이 소녀의 만남을 상상해 보고, 칸트와 프루스트가 보낸 인내의 시간에서 진리란 무엇인지 읽어 낸다. 그 외에 도서관의 기억, 참다운 교양, 새로움이 주는 피로 등을 이야기한다.
2부의 주제는 예술이다. 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 앞에 선 헥토르와 멕베스에게서 구원을 떠올리고, 요양하러 간 온천에서 금홍이를 만난 이상을 통해 문학과 질병의 관계를 논한다. 또한 김수영, 주안 미로, 말러, 바그너, 로스코가 그린 궤적을 따라가 본다.
3부는 사회를 주제로 다룬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왜 '삼국지'보다 '금병매'에 가까운지 질문하고, 도난당한 반에이크 형제의 작품을 보며 사라져 버린 정의를 생각한다. 형제 살인, 극혐, 익명의 힘 등에 관해서도 탐구해 본다.
4부는 삶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든 프리아모스 대왕의 모습을 통해 피할 수 없는 일상을 가리켜 보이고, ‘얼짱’ 마법사 하울의 경박함 속에도 진정한 아름다움을 향한 가능성이 있음을 발견한다. 경쟁의 두려움, 비만, 타인의 눈길 등에도 주목하고 생각을 나누어 본다.
책 속으로좋은 글의 비밀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생각하기를 강요하면서 우리 삶을 내내 성가시게 하는 글, 가능하면 대면하지 않았으면 싶은 글, 쾌감보다 불쾌감을 주는 글일지도 모른다. ─ 「칸트의 문장」, 19쪽
우리의 인생 자체가 사실 가장 쓸모없는 것이지 않은가? 인생은 무엇을 위해 이용되고, 무엇을 위해 동원되고,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 일 자체를 거부한다. 인생은 무엇을 위해 유용해지기를 원하지 않고, 오로지 그 자체를 위해 살고 또 소모되기를 원할 뿐이다. 우리의 신체가 무엇에 이용되기를 원치 않으며 또 쓸모없는 고기로서 그냥 땅에 묻히는 것처럼 말이다. ─ 「문학을 읽는 것이 왜 중요한가?」, 204쪽
타인의 입에 빵을 넣어 줄 수 있는 자는 자신의 입으로 빵을 즐겁게 먹어 본 자이다. 타인의 헐벗은 몸을 따스한 담요로 감싸 줄 수 있는 자는, 담요에 들어가 누워 있는 즐거움을 누려 본 자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자는 타인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 타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는 자이다. 결국 나에게 즐거운 일을 타인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윤리’는 성립한다. ─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322~323쪽
손수건만 해진 하루의 마지막 빛마저 빠르게 나무 그림자 뒤로 빨려 들어가고 시선이 형태를 잃어 지구가 태초의 반죽처럼 어두운 덩어리로 돌아가면, 여행하는 이는 식욕을 채우듯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주위를 영원히 뱅글뱅글 돌고 싶어서 그리운 이의 목소리를 찾는다. 비가 오고 물방울이 대지에 부딪칠 때, 목소리가 섞여 든다. ─ 「목소리」, 314~3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