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가면서 보니까 속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청바지랑 웃옷도 흙이 묻어서 물에 잔뜩 젖어 있더라고요. 그냥 지나쳤는데 텔레비전 보니까 아무래도 이상해서 신고했지요. 옷을 그렇게 찢어 놓을 수가 없었어요."
전북 군산시 대야면 지경리에 사는 A씨(69)가 발견해 신고한 옷은 실종된 이모(40) 씨가 지난 24일 집을 나설 때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경찰은 30일 오전 7시 지경리의 한 농로에서 카디건과 상하의, 속옷 등 이 씨의 옷 6벌을 확보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긴급 정밀감식을 의뢰했다.
일주일째 오리무중이던 이 씨의 행적은 이렇게 주인 잃은 휑뎅그렁한 옷가지로 확인됐다. 더불어 이 씨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도 빛을 잃어가고 있다.
◆ 내연과 임신 vs 그냥 아는 사이
전북 군산에서 지난 24일 실종된 30대 여성과 함께 사라진 경찰 정 모 경사의 인상착의가 담긴 전단지 군산경찰서 제공
사건의 주인공은 40살 동갑내기 남녀다. 전북 군산에 사는 이혼녀 이 모 씨와 군산경찰서 소속 경사 유부남 정완근 씨.
이 씨의 가족은 두 사람이 내연관계였고 이 씨는 임신까지 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건 발생일인 지난 24일 낙태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둘이 만나기로 했고 이날 사단이 났다고 말한다.
이 씨가 이날 정오께 정 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저번처럼 약속을 취소해서 일 못 보게 하지 마라"는 이 같은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경찰도 "정 경사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복원한 결과 두 사람이 굉장히 긴밀한 사이였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반면 정 씨는 경찰조사 당시 "지난해 8월 지인의 소개로 만났지만 그냥 아는 사이일 뿐이며 내연은 결코 아니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이 씨의 전화번호를 스팸 처리했고, 그래서 지난 24일 이 씨가 보낸 문자메시지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씨가 임신한 게 사실이라면 유부남인 정 씨 입장에서는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겠고, 전화번호를 스팸 처리할 정도로 귀찮은 존재였을 것으로 보인다.
◆ 치밀한 계획 vs 우발적 범행사건의 핵심인 지난 24일로 돌아가 보자. 파출소 관리반인 정 씨는 오후 6시 10분께 퇴근해 취미인 낚시를 하러 군산교도소 인근 낚시터를 헤맨다. 오후 7시 18분께에는 낚시터 CCTV에 정 씨의 차량이 찍히기도 한다.
이 씨는 7시 56분께 군산시 미룡동 자신의 집을 나선다. 가족들에게는 정 씨를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
정 씨는 낚시터에 모기도 많고 날도 후텁지근해 몇 곳을 돌다가 오후 10시 10분께 집에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경찰 조사에서 이 씨를 만난 적이 없다고 했고 낚시터 CCTV는 알리바이가 됐다.
정 씨 차량의 블랙박스는 공교롭게도 이날 오후 7시부터 9시 45분까지 삭제돼 있었다. 성능 개선을 위해 5일마다 한 번씩 지운다는 게 정 씨의 설명이다. 경찰이 메모리를 일부 복원했지만 화질이 좋지 않고 날이 어두워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뭔가 계획된 범행의 냄새가 풍긴다.
반면 우발적 범행의 여지도 있다. 사건 발생 며칠 전 정 씨는 적금 500만원을 탔다. 100만 원권 수표 4장과 현금 100만원이다. 이 돈을 가지고 정 씨는 임신한 이 씨와의 낙태 합의를 보려 했을 지도 모른다.
경찰 조사 당시 정 씨의 얼굴에는 손톱자국 같은 상처가 2개 있었고, 차량 블랙박스도 룸미러에 고정되지 않고 떨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합의를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차 안에서 다툼이 벌어졌고 강력사건으로 번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 도망자 경찰관의 이상한 행적옷가지가 발견되면서 이 씨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해지고 있다. 반면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 정 씨는 살아서 잠적 또는 도주 중인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정 씨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26일 0시 10분 경찰 조사 뒤 귀가 -> 집으로 향하지 않고 인터체인지로 향함 -> 오전 9시 50분 강원도 영월군에서 정 씨 차량 발견 -> 오후 3시 대전 용전동 대전 복합터미널 -> 오후 6시 50분 전주 시외버스터미널 -> 오후 7시 46분 군산 대야터미널 -> 오후 8시 택시타고 군산 회현면 월연마을 하차 -> 오후 11시 15분 군산 대야터미널.
경찰 조사 뒤 강원도로 달아난 정 씨는 사람과 차량의 왕래가 잦은 다리 밑에 자신의 쏘렌토 차량을 주차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군산에 잠입했다.
경찰은 정 씨가 택시를 타고 월연마을에서 내린 뒤 옷이 발견된 대야면 지경리까지 걸어와 주민이 자주 다니는 농로 위에 이 씨의 옷을 버린 것으로 보고 있다. 걸어서 한 시간 거리인데다 다시 대야터미널에 나타날 때까지 세 시간가량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정 씨가 차량 또는 옷가지를 남긴 두 사안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잘 발견될 수 있게 배려한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경찰은 이 같은 정 씨의 행동이 수사에 혼선을 줘 경찰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시간을 벌기 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강원도에 차량을 버려 경찰 수사망을 집중시킨 뒤 군산에 잠입하고, 농로 위에 옷을 버려 그 일대를 수색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숨기고 싶은 장소를 지키려한다는 해석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씨가 택시를 타고 내린 월연마을 일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래서 정 씨가 군산에 잠입했을 때 제기됐던 자수, 자살, 뒤처리의 세 가지 가능성 중 세 번째에 큰 무게가 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