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뉴스는 지난해 '성에 탐닉하는 대한민국' 기획 기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잘못된 성문화 현실을 고발했다. 이러한 성문화의 기저에는 왜곡된 성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대안으로 성교육 기획 기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만약 당신이 성폭행을 당했을 때, 그 사실을 주변에 알리겠습니까?""아니오, 숨기겠습니다."
지난 9일 여론 조사 기관 포커스컴퍼니가 공개한 설문 결과를 보면, 여성 3명 중 1명은 성폭행을 당하더라도 그 사실을 숨기겠다고 했다. 성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주변에 알릴 것'이라고 응답한 여성은 66%인 반면, '알리지 않겠다'는 34%였다.
설문 결과에 "알리지 않겠다"는 이유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조사 과정 중의 2차 가해,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적인 시선 등이 이유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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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자 무서워 피해자가 이사2012년 5월 성폭력을 겪은 청소년 A씨는 여전히 괴롭다. 성폭력 피해를 겪은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악몽을 꾸기 때문이다.
A씨는 "가해자가 '엄마에게 이 사건을 말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 때문에 아직도 악몽을 꾼다"고 했다. 가해자는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아무렇지 않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성폭력 상담소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성폭력 범죄 처리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가해자에 대한 처벌, 사후 교육·치료·관리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꼽는다.
아하!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이목소희 팀장은 "초범이라는 이유로,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혹은 가해자가 취중 상태였다는 이유 등으로 성범죄 기소율과 유죄 선고율이 굉장히 낮다"며, "그래서 성폭력 신고도 하나마나라는 인식이 있다"고 했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오히려 피해자와 가족들이 살던 지역을 떠난다. A씨와 가족은 살던 지역을 떠났다. 같은 지역에 사는 가해자를 우연으로라도 만날까 두렵다는 이유였다.
◇ "난 피해자이지, 죄인이 아닌데"아는 또래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B양(15)은 학교에 가기가 싫다. 이미 학교에 소문이 다 퍼졌기 때문이다. B양은 학교에 가도 공부가 되지 않아 대부분을 책상에 엎드려 잔다. 학교에서는 B양을 가만두지 않는다. 선생님들은 계속 관심을 두고 B양에게 수시로 말을 걸거나, 상담을 하자고 한다.
주변 친구들의 시선도 부담스럽다. 하루는 그동안 비정기적이던 성폭력 예방 교육이 B양의 사건 이후 강당에서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친구들은 "너 때문이야"라며 쑥덕거렸다.
B양은 "학교에서는 나를 치료해야 할 환자 취급하고, 친구들은 나를 죄인 취급한다. 피해 사실은 경찰서에서 한 번만 말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아동 청소년 성보호 종합대책 연구' 중,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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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이든 호기심이든 주변에서 별생각 없이 던지는 눈길과 말투는 피해자와 가족을 의도치 않게 괴롭힌다. 피해자가 당할 만한 짓을 했다는 식으로 소문이 나거나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던 것처럼 비치는 일도 있다.
이러한 2차 가해는 조사나 수사 과정에서도 많이 이루어진다. 2004년 일어난 밀양 고등학생 집단 성폭행 사건 때는 1년여 동안 40여 명에게 유린당한 소녀가 가해자 가족에게서 협박을 받는가 하면, 수사를 맡은 경찰관은 "밀양의 물을 다 흐려놓았다"고 피해 중학생에게 폭언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의붓아버지가 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는 검사가 피해자인 여고생에게 2차 가해 발언을 했다. "솔직히 말해야 해. 너 아빠랑 사귄 거 맞지? 문자 내용 보니까 아빠랑 사랑한 거네"라고 물었다.
또 범인 검거를 위해 경관이 피해 아동을 데리고 범행 현장을 찾으러 다니는 과정에서 피해 사실이 알려진 일도 있다.
이목소희 팀장은 "성폭력 피해자는 안 그래도 신체적·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상황인데, (피해자에게) 평소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옷차림이 야하진 않았는지 물으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비난한다"며 "때문에 피해자들은 주변 사람과 사회의 시선 때문에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고 했다.[BestNocut_R]
성폭력이 피해자의 개인적인 치부, 감추어야 할 부끄러운 문제라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한 분위기에서 피해자는 신고나 고소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초등생 이상에게 진행되는 성폭력 예방 교육 시 '2차 가해는 1차 가해 못지 않게 심각한 폭력'이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성폭력 사건을 피해자 중심이 아닌 가해자 중심으로 인식을 전환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령 '조두순 사건'이나, '밀양 고등학생 집단 성폭행 사건'처럼 명칭을 피해자가 가해자의 이름을 붙이는 식이다.
다음 기사 : 청소년 대상 피임 교육도움 : 굿네이버스, 아하!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사)푸른아우성
자문 : 임정혁. 경기도 오산 거주. 7살, 5살, 2살짜리 세 딸을 키우는 딸바보 아빠. 전 화성여성회 성 평등 강사단 교육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법무부 법교육 출장 강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어린이집·학교·교회 등 1년에 300회 정도 성교육을 하고 있다. |
우리 아이 성폭력 당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가 성폭행을 당했을 때 제일 중요한 건 부모의 반응이다. "그게 정말이니? 거짓말 아니니?", "거기를 왜 갔니?", "내가 그런 사람 조심하라고 그랬잖니?", "아무나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니?", "왜 진작 말하지 않았니?", "그 얘기는 그만하자. 넌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등 부모가 처음 내뱉는 말이 아이 가슴에 영원히 새겨진다. 감싸주고 보듬어 주어야 할 부모가 오히려 2차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성폭력을 당한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한다. 평소처럼 지내거나, 울면서 들어오는 경우다. 평소처럼 지내는 건 당장은 몰라도 언젠가 그 흔적이 나타난다. 만약 별다른 이유 없이 부모가 안아주거나 뽀뽀하는 걸 거부하거나, 성인 남성을 무서워하는 모습, 인형에게 성적 가해 행동을 하는 등 폭력적인 모습이 보인다면 차분히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아이가 울면서 들어오거나 주변 아이들이 대신 얘기해 주는 경우다. 이 경우는 아이가 분명히 상처를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동시에 가해자 인상착의 등도 잘 기억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럴 때는 아이의 말을 녹음하거나, 아이에게 아프게 한 사람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림이 자세하지 않아도 특징만 알게 되면 신속한 범인 검거에 도움이 된다.
아이가 울며 들어왔을 때 부모의 대응이 가장 중요하다. 무조건 침착해야 한다. 매우 놀랄 수밖에 없지만 아이 앞에서는 평온해야 한다. 부모가 놀라고 힘들어하면 아이는 내 잘못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고 상처를 치료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다음 외상을 잘 살펴야 한다. 어디 상처는 없는지 혹시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는지 살피는 것. 만약 성폭행 외상이 없다면 아이에게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아빠와 엄마가 그 나쁜 어른보다 훨씬 힘이 세고 너를 사랑한다고 얘기해주며 대화의 물꼬를 트자.
만약 외상이 보인다면 아이를 절대 씻기면 안 된다. 옷을 갈아입히되 원래 옷은 반드시 종이봉투에 넣고 아이의 머리 정도만 추스른다. 또한 지금은 네가 조금 다친 것이지만 감기에 걸린 것처럼 병원에 다녀오면 금방 괜찮아질 수 있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자.
세 번째 아이와 대화 시에는 범인을 물색하려 하기 보다는 안정에 주안점을 두자. 아이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아빠 엄마와 함께 이제부터 힘을 합쳐 너를 아프게 한 또는 너를 함부로 만진 아저씨 또는 아주머니를 야단맞게 하자 얘기하면서 이동 준비를 하자.
이동은 경찰서가 아닌 상담소로 하자. 경찰서로 바로 가는 것도 좋지만, 경찰서는 아이는 물론 어른에게도 낯설고 힘든 곳이다. 성폭력 문제는 전문가와 대동할 수 있게 되어 있어 전문가와 함께 가면 훨씬 일이 수월하게 풀릴 수 있다.
만약 아이의 외상이 커서 긴급히 이동해야 할 경우에는 119로 신고하여 이동하면서 동시에 상담소에 연락하자. 그러면 상담가가 병원으로 오게 되어 상황 파악 후 처리를 도와줄 것이다.
여성긴급상담전화 : 1366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등의 긴급전화상담, 긴급보호)
임정혁.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법무부 법교육 출장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