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아무 일 없는 듯 폭탄을 가슴에 안고 인파 사이를 헤쳐 나가/…/의사는 손을 들어 폭탄을 투척하네/…/중화의 건아들아 부끄러워 하여라/일세의 호걸을 우러러보아라/천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으리."
1941년 한국광복군총사령부가 처음 발행한 광복군 기관지인 '광복' 제1권 4기(6월호)에 실린 중국 문인 징메이주((景梅九·1882∼1961)의 시 '의사행'(義士行)의 일부다.
징메이주는 1911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국풍일보'(國風日報)의 편집·출판을 맡았고, 1934년 시안(西安)에서 항일 구국 잡지 '출로'(出路)를 낸 언론인이자 문인이다.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은 그를 '장안 8대가'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9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징메이주가 '광복'에 기고한 의사행은 한인애국단의 3대 의거를 노래한 시로, 1편에서는 이봉창 의거, 2편에서는 윤봉길 의거, 3편에서는 대련의거의 위대함과 용맹함을 칭송했다.
세 편의 시 가운데 가장 직설적으로 흠모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의사행 2편이다.
이 시는 의거를 앞둔 윤봉길 의사의 엄숙한 모습으로 시작한다.
"고국의 가을바람에 화수가 동하고/ 감나무 밭의 의사는 홀로 고뇌에 잠겨 있네/천성이 오골스러워 남의 노예가 되기를 싫어하니/적심을 드러내어 만고를 비추도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축하 기념식장에 '도시락 폭탄'을 던지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비장함과 충격이 생생히 묘사된다.
"白川(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이 입을 막 놀리려 할 때/ 의사는 손을 들어 폭탄을 투척하네/ 벽력과 같은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고/ 피와 살이 흩어지고 뼈는 춤을 추네."
이어 징메이주는 윤봉길 의사에 대한 흠모와 존경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시를 마무리 지었다.
"중화의 건아들아 부끄러워 하여라/일세의 호걸을 우러러보아라/ 쳔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으리/ 구천에서도 中韓(중한)을 위해/ 왜노들을 모조리 쳐부수어/ 우리의 강산을 온전히 찾도록 도와주소서/ 광복의 제일 큰 공은 바로 이 의거에 있도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윤주 부회장은 "징메이주의 헌시는 중국에서 윤봉길 의거에 대한 반응이 열렬했음을 보여준다"면서 "중국인들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한을 대신 풀어줬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매우 존경했다"고 말했다.
아래는 의사행 2편 번역본 전문.
고국의 가을바람에 화수가 동하고
감나무 밭의 의사는 홀로 고뇌에 잠겨있네
천성이 오골스러워 남의 노예 되기를 싫어하니
적심을 드러내어 만고를 비추도다.
어깨를 바로하고 머리를 치켜세우며 상하이에 이르러
태극기 아래 왜노 격멸을 맹세하였네.
한 몸, 가정이 아닌 나라 위해 바치니
자유와 자주를 위함이니라.
왜놈의 우두머리 白川이
호기 부리며 열병하니
훙커우 공원에 무위를 뽐내더라.
왜인들은 모두 즐거워 웃으나 한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고,
의사는 아무 일 없는 듯
폭탄을 가슴에 안고 인파 사이를 헤쳐 나가
열병대 앞에 버티어 서니
왜놈들의 우두머리 깜짝 놀라네.
白川이 막 입을 놀리려 할 때
의사는 손을 들어 폭탄을 투척하네.
벽력과 같은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고
피와 살이 흩어지고 뼈는 춤을 추네.
스무 발의 예포는 울려보지도 못하고,
삼군의 깃발은 날려보지도 못하였네.
나머지 무리들은 짐승처럼 피할 곳을 찾고
저들의 괴수는 시체도 온전치 못하였도다.
중화의 건아들아 부끄러워 하여라
일세의 호걸을 우러러 보아라
천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으리
구천에서도 중한을 위해
왜노들을 모조리 쳐부수어
우리의 강산을 온전히 찾도록 도와주소서
광복의 제일 큰 공은 바로 이 의거에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