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훔 작가의 '내리면 탑시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열차 안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무작정 발을 집어넣고 보는 사람들. 내리는 사람은 타는 사람의 목을 치면서 뼈 있는 한마디를 날린다. "내리고 탑시다!" 다소 과격하고 폭력적인 그림과 함께 쓰인 여섯 글자가 지하철 비매너에 일침을 날린다. 일러스트레이터 김나훔 작가의 작품 '내리면 탑시다'를 두고 하는 말이다.
미술의 영역이 더는 캔버스와 물감만을 재료로 하지 않는 요즘, 인터넷에는 웹툰에 이어 '이야기가 있는 그림'인 일러스트(일러스트레이션)가 뜨고 있다. 그 가운데 일상에서 깨알같은 순간을 재조명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김나훔 작가를 만나 그의 작품 탄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 소개 먼저 부탁한다 = 일러스트레이터 김나훔(28)입니다. 현재 인쇄 관련 일을 하면서 일러스트 작업과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 글자를 이용한 디자인)를 같이 하고 있어요.
▶ 어떻게 일러스트레이터가 됐나? =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4년 정도 됐어요. 전 미대 전공자가 아니라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어요. 사실 일러스트 분야가 있는지도 몰랐어요.(웃음) 그냥 혼자 컴퓨터로, 기초라고 할 것도 없이 컴퓨터 일러스트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걸 통해서 일상생활 속 느끼는 감정, 상황 등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그림을 그리게 됐죠.
김나훔 작가의 '교통비 아끼는 법'
▶ 그림을 배우지 않아도 표현력이 뛰어나다 = 사실 고교 시절, 미대 진학을 꿈꿨어요. 제가 공부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미대 가서 그림 공부는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집안 반대(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이유로)로 대신 제과‧제빵을 선택했죠. 하고 싶은 그림과는 전혀 다른 분야를 공부하면서 방황도 많이 했어요. 우습게도 전 미대에 가면 무조건 캔버스에 물감,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줄 알았거든요. 시각디자인, 웹 디자인처럼 컴퓨터를 통해 그림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지금처럼 작업할 수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방황하지 않고 일찍 마음잡는 건데, 미대 못 간 걸 앞세워 방황을 좀 많이 했거든요.
▶ 집에서는 응원해주는 편인가= 삼 남매 중 제가 둘짼데 제일 문제아였어요. 누나랑 동생은 착실하게 공부 잘하고 다들 인정받는 직업 가졌는데 저만 겉돌았죠. 부모님은 제가 일러스트 한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 하셨대요. 그림 전에 음악이랑 사진을 한다고 난리 친 적이 있어서.(웃음) 그림 역시 '얼마 못 가 그만두겠지'라고 생각하셨대요. 지금은 제 작품이 인기 있는 걸 알고 또 상업적으로도 제 그림(가방이나 캐릭터 상품 등)이 나오니깐 응원해주고 격려해줘요.
김나훔 작가 '산책하기 좋은 날'
▶ 일러스트레이터 말고 인쇄일도 병행…어떻게 시작?= 제가 원래 강원도에서 살다 2012년 초에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림공부는 그때 막 시작했고 일단 먹고 살아야겠길래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인쇄소에 들어갔어요. 지금 생각해도 인쇄소 사장님께 참 감사해요. 일과 동시에 그림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셨거든요. 4년 전보다 경제적 여유가 생겼지만 일은 계속하고 있어요. 그림 작업에 도움도 되고, 인쇄 일 역시 보람 있거든요. 투잡이라는 생각 보다 일의 연장선이라 생각하고 계속하려고요.
▶ 그림마다 등장하는 캐릭터…이름이 따로 있나? = 솔직히 일부러 캐릭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인물의 감정표현, 심리상태에 집중하다 보니 특별하게 캐릭터를 생각하지 않고 그렸어요. 제 머리와 비슷하게 그려서 그런가.. 일관된 머리와 스타일이 나와서 다들 하나의 캐릭터로 보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캐릭터를 만들기보다 그냥 심리표현에 집중하고 싶어요.
▶ 이미 SNS에서는 유명스타= 미대 나온 게 아니니 그림 그려본 경험이 없잖아요. 최대한 많이 그려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싶었어요. 뭐 그렇게 그려도 제 그림을 찾아와 볼 사람은 없었지만요. 그래서 스스로 SNS에 올려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된 거에요. 먼저 나서는 성격이 아닌데 제 작품을 보여주려고 사람들한테 다가간 것 같아요. 작품이 알려지길 꿈꾸면서...(웃음)
지하철 '내리면 탑시다'역시 SNS에 당시 지하철에서 느낀 감정을 그려 올렸는데 그걸 공감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퍼 나르면서 유명해졌어요. 그 과정에서 영화 '잉투기' 마케팅팀에서 보고 포스터 의뢰요청을 해 포스터 작업까지 하게 됐네요.
김나훔 작가의 '좀 먹자'
▶ 최근에는 다소 저조한 SNS 활동, 이유는? =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SNS에 올린다고 사람들이 많이 볼까 싶은 거죠. 물론 SNS통해 저를 많이 알릴 기회는 됐지만, 현실과 이상의 차이는 있는 것 같아요.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며 제 작품을 봤으면 좋겠는데.. 하는 아쉬움과 또 현실적으로 SNS에 올려서 백날 '좋아요'의 누름을 받는다고 한들 그게 돈이 될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생계 걱정이 들기 시작했죠. 그때 마침 기업체에서 업무 제휴가 들어와 상업화 일을 하게 된거고요.
▶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나?
= 일상생활에서 얻어요. 사물보다 사람을 표현하는 걸 좋아해요. 어떤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거죠. 평소 본 상황, 느낀 감정을 기록해 뒀다가 작업할 때마다 꺼내 봐요.
김나훔 작가의 '일요일'
▶ 메모는 주로 어디에? = 스마트 폰에 기록해요. 사진도 찍고요. 뭐든 생각날 때마다 기록하는 편이라 개수를 세보지 않았는데... (스마트 폰을 한참 보더니) 얼추 1,300개 정도 되는 것 같은데요. 며칠 전 밤에 메모들을 살펴보는데 스크롤을 한참 내려가며 보다가 지쳐서 잤던 기억이 나네요. (웃음) 거의 3~4년간 메모해 둔 거라 내용이 엄청나요. 그래서 자료 백업은 필수죠. 만약 백업실패로 메모가 삭제된다면 한동안 패닉 상태로 지낼 것 같아요.
▶ 작업은 주로 언제, 어떻게 하나? = 인쇄소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가서 저녁 먹고 9시 전후로 작업 시작해서 보통 2시 전에 마무리해요. 처음엔 3~4시까지 했는데 몸이 안 좋아지더라고요. 또 제 경우 작업시간이 비교적 짧은 편이라 짧은 시간 내 다작하는 편이에요. 아이디어들을 여러 개 적어놓고 그중에서 골라서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