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강에게' 스틸컷(사진=인디스토리 제공)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이의 상실감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영화 '한강에게'는 그 고통의 무게를 감당해내는 여정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웅변한다.
진아(강진아 분)는 시를 못 쓰게 된 시인이다. 뜻밖의 사고로 연인 길우(강길우 분)와 멀어진 뒤로는 열심히 준비하던 첫 시집마저 뒷전이 됐다. 어김없이 일상을 사는 듯 보이지만, 진아는 하루하루 추억과 추억 사이를 겉돌며 써지지 않는 시를 부여잡고 있다.
연인 길우와 희로애락을 나눴기에 이제는 진아에게 고통이 돼 버린 공간들이 있다. 둘이 함께 지내던 집, 그리고 이 영화 제목에도 등장하는 한강.
보금자리로 일컬어지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진아에게는 버겁다.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길우와의 추억이 그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적막이 휘감은 집 안에서 해질녘까지 침대에만 누워 있는 진아를 보는 심정은 그래서 아프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추억을 쌓아 온 한강은 이제 진아에게는 터부가 됐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도 차창 밖으로 한강이 눈에 들어오면 애써 자리를 옮겨 그 풍광을 피하게 된지 이미 오래다.
남겨진 자들의 삶이 버거울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여전히 일상을 영위해야 할 그 모든 공간에서 떠나보낸 이들이 남겨둔 흔적을 접하기 때문이다. 매일 대면할 수밖에 없는 그 삶터의 풍경은 어김없이 떠나간 이들을 소환한다. 그렇게 진아에게 어제의 웃음은 오늘의 눈물이 됐다.
주인공 진아의 시선은 관객들의 눈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진아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카메라가 가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는 박근영 감독의 말에서도 진아의 경험은 결국 관객들이 감당해내야 할 몫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게 이 영화를 휘감은 정서는 자연스레 세월호 참사 5주기를 앞둔 우리네 현실을 반추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오프닝 스퀀스에서 진아가 광화문광장 세월호 추모공간을 찾아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는 장면은 확증을 더한다.
가족이 아닌 연인의 입장에서 그려낸 상실감, 연인의 사고 당시 그 자리에 없던 진아라는 존재의 보편성은 5년 전 봄 그날의 기억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뜻 모를 죄책감과 두려움 탓에 애써 삶의 무게를 외면하려는 영화 속 진아는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를 대표하는 듯하다.
대학 강단에 선 채 학생들에게 "나만의 '왜?'를 찾으라"고 역설하는 진아의 모습은 "요즘 제 시를 못 잃겠어요. 거짓말 같기도 하고…"라는 그의 또 다른 말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렇게 벌어진 의지와 실천의 격차 큰 간극은 우리를 뜨끔하게 만든다.
극중 "비극이란 게 안 지나가기도 하는 것 같다"는 친구의 말은 진아에게도, 관객들에게도 전환점이 된다. 결국 남겨지고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주어진 몫은 '대면하기'와 '직시하기', 그리고 '다시금 일어서기'라는 이치 말이다.
주인공 진아가 삶을 이어갈 끈을 다시 잡게 되는 여정은 고되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염려한 탓에 현재의 소중한 가치들을 무너뜨려 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이어진 고통 역시 컸다. 그것은 이 영화를 볼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극 말미를 장식하는, 이 영화 제목과 같은 '한강에게'라는 진아의 시는 영화를 본 뒤에야 온전히 와닿을 법하다.
계단은 먼 곳으로 쏟아진다/ 강변에 서면 예외 없이/ 마음은 낮은 곳으로 미끄러진다// 강물에 아직 그의 얼굴이 걸려 있고/ 흔들리는 다리에는/ 다 접지 못한 날개로 갈매기들이 앉았다// 책의 첫 장에 그 사람을 써서 보냈다/ 그가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의 말이 떠오르고/ 떠오르는 모든 것을 미워했다/ 다음 말을 골라야 했지만// 물길이 높아져 있었다/ 빛들이 강 건너에 오래 떠돈다/ 유일한 증인처럼 강물은/ 가장 어두운 곳까지 손을 놓지 않고/ 망망한 것들은 흐르지 않기도 했다// 돌아갈 길이 아득해/ 더 멀리 가고만 싶었던 날들에게/ 꿈이라고/ 꿈처럼 말해야 했지만다음달 4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8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