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3일 개봉하는 '블랙머니'는 수사를 위해서라면 거침없이 막 가는 '막프로' 양민혁 검사(조진웅 분)가 자신이 조사를 담당한 피의자의 자살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되고, 누명을 벗기 위해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다 거대한 금융 비리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사진=질라라비, 아우라픽처스 제공)
※ 영화 '블랙머니'의 내용이 나옵니다.
70조짜리 은행이 하루아침에 1조 7천억 원으로 평가받는다. 팩스 다섯 장으로. 자기자본비율(BIS, 총자본에 대한 자기자본의 비율, 기업의 자본 건전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을 조작한 덕이다. 수사기관이 이 이상한 일을 수사하기 시작하는데, 사건 관계자 둘이 돌연 죽어버린다. 그중 여성 피의자는 검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문자를 남기고.
졸지에 '성추행 검사'로 찍혀 조직 내에서도 혀를 끌끌 차는 주인공은 바로 양민혁(조진웅 분)이다. 그는 스스로 누명을 벗겠다고 이를 간다. 스타펀드의 대한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파헤치게 된 첫 번째 동기는 이 같은 사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민혁은 사건에 접근할수록 수상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노동인권 변호사 서권영(최덕문 분)을 통해 대한은행 매각 사건의 실체에 한 발짝씩 다가서는 양민혁은 국제통상 전문가이자 스타펀드의 법률 자문인 김나리(이하늬 분)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잖아도 여론이 좋지 않고 반발이 심한 것에 의문을 품었던 김나리는 오랫동안 알아 온 스승이자 전 총리인 이광주(이경영 분)에게 숨기는 게 있으면 말해달라고 요청한다.
첫 구절부터 눈치챈 독자도 있겠지만, '블랙머니'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된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소재로 만들었다. 한쪽엔 이광주를 필두로 한 다수의 모피아(MOFIA, 재경부 관료 출신 인사들이 퇴임 후에 정계나 금융권으로 진출해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마피아에 빗댄 말)가, 다른 한쪽엔 불공정한 거래를 막아달라며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투쟁하는 노동자가 등장한다.
누군가는 잊었을, 혹은 아예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일을 정지영 감독은 촘촘하게 재조립했다. 2012년 처음으로 구상한 후 시나리오 쓰는 데만 6년이 걸린 만큼, 오랜 취재와 공부의 흔적이 담겼다. 실제 있었던 일을 뼈대로 두고, 영화적 재미와 전개를 위해 허구도 들어갔다.
무엇보다 관객으로서 가장 생생하게 느낀 건, 경제 이야기인데도 어렵지 않고 재밌다는 것이었다.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등 최근작이 매우 무겁고 어두운 내용과 분위기여서, '블랙머니'도 그런 기조이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기우였다. 속도감 있는 전개를 방해하는 것들을 툭툭 쳐내고, 관객들이 빨리 이 이야기에 올라탈 수 있게끔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어려운 경제 용어가 낯선 사정은 양민혁도 마찬가지라서, 영화는 그가 타인에게서 듣는 설명과 그가 하는 말을 통해 관객들도 같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게 설계돼 있다.
스타펀드의 대한은행 매각 사건에서 미심쩍은 부분을 들여다본 취재물이 석연찮은 이유로 불방돼 방송사 노조원들이 항의하는 점,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에 가입돼 페이퍼컴퍼니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국내 언론사가 뉴스탐사 하나뿐이라는 점, 범죄에 가담하고도 '나는 믿는 사람'이라며 난데없이 신앙을 강조하는 고위 인사가 나오는 점 등 한국사회를 거쳐온 사람들이 한 번쯤은 목격했을 만한 장면이 영화에 담겼다.
조진웅은 막프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검사 양민혁 역을, 이하늬는 국제통상 전문가이자 스타펀드의 법률 자문인 김나리 역을 연기했다. (사진=질라라비, 아우라픽처스 제공)
다소 감정적이고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기에 절차와 수단도 가리지 않는 양민혁과 그 무리는 선, 처음에는 속을 알 수 없다가 뒤로 갈수록 본색을 드러내는 이광주 등 모피아들은 악으로 그려진다. 음악 사용의 목적도 분명하다. 분노를 고조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처럼 선악이 분명한 영화다. 그러나 사회 고발적인 내용을 담은 범죄 오락물이 선악을 뚜렷이 구분하는 건 익숙한 일이기에, 이를 오로지 '블랙머니'만의 결함이라고 말할 순 없다.
국내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간에 사익 추구에 혈안이 된 상위 1% 엘리트들의 모습은 매우 세련되게 그려진다. 어쩔 수 없이 교활함이 드러날 때도 있지만, 대부분 화려하고 여유로운 자리에서 본인 음량을 크게 키우지 않으며 '우아'를 떤다. 사건의 핵심 역할을 하는 이광주조차 세계적인 경제 포럼에 나가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유무역' 운운한다. 대한은행 헐값 매각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사회주의 하자는 거야, 뭐야?"라고 성을 내면서도.
막 간다는 의미로 '막프로'란 별명이 붙은 양민혁을 진짜 살아있는 사람처럼 만든 데는 조진웅의 공이 컸다. 자유자재로 쓰는 사투리, 때론 머리로 때론 몸으로 수사에 나서는 패기와 에너지는 이 영화를 펄펄 끓게 만든다. 이하늬의 변신도 반갑다. 그동안 항공우주연구소 엘리트 연구원('로봇, 소리'), 국립보건원 연구원('연가시') 등 전문직을 맡은 게 처음은 아니지만, 최근 영화 필모그래피는 코믹함과 털털함이 강조된 역할이 눈에 띄었는데, 지성이 돋보이는 냉철한 국제통상 전문가 역할도 무척 잘 어울린다는 것을 연기로 입증했다.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된 '경력 도합 400년'을 자랑하는 조연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빛난다. 사람 좋고 의로운 역할 하면 바로 떠오르는 강신일은 병상에서도 양민혁을 돕는 장 수사관 역을, 다수 작품에서 스펙트럼 넓은 연기를 펼친 최덕문이 노동인권 변호사 서권영 역을, 조한철은 매서운 눈빛으로 철저히 자기 이득을 계산하는 대검찰청 중수부장 김남규 역을, 악역으로 눈도장을 찍어 온 허성태가 양민혁의 친구이자 조직에 충성하는 중수부 검사 최프로 역을 맡았다. 연기만큼 입담이 좋은 서현철은 겁에 질린 표정이 압권인 씬 스틸러 임승만 국장으로 분했다.
악을 대변하는 고위층 역할을 여러 차례 보여준 문성근과 이경영이 각각 CK 로펌 대표 강기춘과 전 총리 이광주 역을, 이성민은 묻힌 사건을 재수사하려다가 뇌물 수수 사건에 휘말리는 신임 검찰총장 역을, 남명렬은 점잖은 어른인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한 나리 아버지 역을 연기했다. 불방 결정을 내려 항의받는 MBS 사장 역은 이재용이, 스타펀드 코리아의 날라리 같은 사장은 신예 유태오가 맡았다. 류승수, 정인기, 정민성, 이나라, 아역 배우 김강훈까지 크고 작은 역할로 포진한 다양한 배우를 찾아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무거운 영화'가 아니라 '재미있는 영화'이길 바란다는 정지영 감독의 각오가 잘 살아났다. 어느새 잊힌 과거를 다시 한번 꺼낸 것도 이 영화의 공이다.
13일 개봉, 상영시간 113분 20초, 12세 이상 관람가, 한국, 범죄·드라마.
왼쪽 위부터 조진웅, 이하늬, 조한철, 문성근. 오른쪽 위부터 이경영, 강신일, 최덕문, 허성태, 이성민, 서현철 (사진=질라라비, 아우라픽처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