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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리뷰]쓰이고 버려지길 거부한 존재의 눈부신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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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컷 리뷰]쓰이고 버려지길 거부한 존재의 눈부신 생존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감독 이태겸)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홍시쥔·㈜영화사진진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사람마저 쉽게 쓰이고 쉽게 버려진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세상과 스스로에게 '해고' 당하지 않고 오롯이 살아가고자 하는 한 노동자의 이야기이자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한 인간의 눈부신 생존기다.

    정은(유다인)은 7년간 근무했던 회사에서 하청업체로 파견 명령을 받는다. 말이 파견 명령이지 사실상 해고의 의미로 자진해서 회사를 떠나라는 협박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찾아보려 하는 정은이지만 하청업체 사람들은 그를 불편해하고, 현장 일은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반드시 1년을 채워 원청으로 돌아가고 싶은 정은은 막내(오정세)의 도움으로 차근차근 일을 배워나간다.

    영화는 권고사직을 거부하던 중 하청업체로 파견을 가면 1년 후 원청으로 복귀시켜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정은이 1년의 시간을 버텨내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담았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직장에서도, 삶에서도 스스로를 해고하지 않기 위해 살아나가는 정은의 이야기다.

    갑과 을로 이어진 원청과 하청의 관계, 권고사직과 불법파견에 얽힌 그림자, 위험의 외주화, 노노 갈등, 고용불안과 직장 내 성차별 등 한국 사회와 노동자들의 이면을 직설적으로 건드린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홍시쥔·㈜영화사진진 제공

     

    정은의 속사정은 세세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상황 그리고 그와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애초에 정은의 권고사직과 불법파견 역시 논리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이에 항의하는 정은의 목소리 역시 원청이나 사회에까지 닿지 못할 것이다.

    그저 쓰이다가 해고되는 노동자의 삶, 제대로 보이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노동자를 향한 불법·부당한 현실이 정은을 통해 엿보인다.

    제대로 된 장비조차 지급되지 않아 이를 사비로 사는 하청업체 직원들, 원청의 부당한 압력에 제 살을 깎아 낼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구조에 놓인 노동자들, 고전압이 흐르는 발밑 까마득한 송전탑을 오르내리는 현장 등이 현실적으로 그려지며 현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노동자의 현실과 불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고발하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정은의 삶을 둘러싼 노동자와 노동 환경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영화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정은'이라는 인물이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은을 비추고, 정은을 뒤따른다. 오롯이 한 인물만을 따르며 그의 삶, 그의 감정, 그의 이야기에 녹아들게끔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달려온 직장, 그곳으로부터 부당하게 해고될 위기에 놓인 정은은 무채색의 표정 안으로 슬픔과 고통을 갈무리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가고,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배우며 포기하지 않는다.

    직장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배척받던 정은은 자신에게 다가온 막내의 도움을 통해 막다른 길에서 벗어나 점차 한 걸음씩 나아간다.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느낀 후에야 웃지 않던 정은은 비로소 웃음을 짓는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홍시쥔·㈜영화사진진 제공

     

    아득바득 해고에서 벗어나고자 한 정은의 삶은 결국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자신을 낳은 부모에게, 열정과 젊은 날을 바친 직장에, 사회로부터 해고당할지언정 자기만큼은 자신을 해고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다시 말해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적어도 '인간'으로 살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외부의 압력만큼이나 위협적인 것은 내면의 공포다. 극 중 송전탑은 이러한 점에서 한 존재가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뛰어넘어야 할 트라우마이자 고비이다.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었던 송전탑. 그곳을 정은이 정면으로 마주하고 홀로 그 위에 오르는 순간, 그는 압박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이는 노동자가 아닌 자신으로서, 여성이나 하청 직원이 아닌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박 대리가 아닌 박정은으로서 살아가야 함을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되새기고 곱씹게 만드는 대목이다.

    배우 유다인은 한 노동자이자, 한 존재로서 오롯이 살아남아 앞으로를 살아가고자 하는 정은을 깊은 공감으로 연기해냈다. 하청업체 막내 역의 오정세는 순간순간 강렬한 존재감을 보이며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영화는 노동과 생존, 삶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깊이 있으면서도 묵직하게 그려낸다. 여기에서 현실을 향해 끊임없이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이는 감독의 고민을 느낄 수 있다.

    111분 상영, 1월 28일 개봉, 12세 관람가.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포스터. 홍시쥔·㈜영화사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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