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존슨-톰슨. 연합뉴스올림픽의 꽃은 메달이다.
하지만 진짜 올림픽 정신은 승리보다 참가, 성공보다 노력, 그리고 평화다. 여전히 메달에 울고 웃는 올림픽이지만, 도쿄 올림픽에서도 올림픽 정신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었다. 아픔을 참는 투혼, 서로를 격려하는 우정, 시련을 이겨내는 극복, 패배를 수긍하는 인정까지.
투혼
# 여자 기계체조 예선. 다누시아 프랜시스(자메이카)는 이단평행봉에서 단 11초 연기를 펼치고 내려왔다.
사실 프랜시스는 예선 이틀 전 훈련에서 왼쪽 무릎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됐다. 당연히 올림픽 출전은 불가능했다. 의사도 출전을 만류했다. 하지만 프랜시스의 꿈을 막지 못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영국의 대체 선수였던 프랜시스는 부모님의 국적 자메이카 국기를 달고, 9년을 기다린 올림픽에 나섰다.
왼쪽 무릎에 붕대를 감고 이단평행봉에 올랐고, 11초 만에 오른 다리로만 사뿐히 착지했다. 이어 심판진에게 사과했고, 심판진은 오히려 프랜시스의 투혼을 인정해 9.033점의 높은 수행 점수를 줬다.
프랜시스는 "정말 특별한 순간이었다. 내가 꿈꿨던 연기는 아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커다란 성취였다"고 웃었다.
# 육상 여자 7종 경기 200m. 우승 후보 중 하나였던 카타리나 존슨-톰슨(영국)이 곡선 주로에서 넘어졌다. 응급요원은 곧바로 휠체어를 가지고 뛰어나왔지만, 존슨-톰슨은 휠체어에 앉는 것을 거절했다.
존슨-톰슨은 지난해 왼쪽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다. 올림픽이 1년 연기된 덕분에 재활을 거쳐 출전할 수 있었다.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넘어지면서 주로를 이탈해 실격 상태였지만, 존슨-톰슨은 일어서 끝까지 달렸다. 7위(25초57)보다 68초 늦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도저히 경기를 이어갈 수 없는 상태. 이후 나머지 종목은 기권했다.
존슨-톰슨의 SNS에는 "나는 천성적으로 우유부단해서 두 개의 성(존슨, 톰슨)과 7종 경기를 선택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존슨-톰슨의 레이스는 우유부단하지 않았다. 야후스포츠는 "그것은 작은 승리였고,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박수를 보냈다.
# 여자 배구 김희진(30, IBK기업은행)은 무릎 수술 두 달 만에 올림픽에 나섰다. 경기를 마치면 무릎이 퉁퉁 붓는다. 탁구 신유빈(17, 대한항공), 배드민턴 안세영(19, 삼성생명)은 경기 도중 피를 흘리고도 끝까지 싸웠다. 다이빙 여자 10m 플랫폼에 나선 권하림(22, 광주광역시체육회)는 발목을 다친 채로 입수했다.
올림픽이니까, 아파도 포기할 수 없었다.
무타즈에사 바심(왼쪽)과 장마르코 탬베리. 연합뉴스우정
# 육상 남자 높이뛰기 결승.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이후 무려 109년 만에 육상 공동 금메달이 나왔다. 주인공은 무타즈에사 바심(카타르)과 장마르코 탬베리(이탈리아).
둘은 나란히 2m37을 넘었다. 후반 기록이 더 좋은 선수가 이기는 '카운트 백'도 동률. 금메달을 가리는 방법은 '점프 오프'로 최후의 1인을 가리거나, 아니면 공동 금메달 수상 등 두 가지였다. 바심이 먼저 심판에게 "공동 금메달이 가능하냐"고 문의했고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심판진은 탬베리의 의사도 타진했고 "오케이"라는 답을 받았다. 그렇게 공동 금메달이 나왔다.
바심과 탬베리는 수년 동안 만나 경쟁자이자, 오랜 친구였다. 바심은 트위터에 탬베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하나의 금메달보다 좋은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금메달 2개입니다"라고 기뻐했다.
# 육상 남자 800m 준결승 3조. 레이스 막판 아이제아 주윗(미국)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서 뒤를 따르던 니젤 아모스(보츠나와)와 엉켜 넘어졌다. 주윗은 드러누웠고, 아모스는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그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내 손을 내밀어 서로를 일으켰다. 미안하다는 제스처와 함께 다시 레이스를 시작했고, 차례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주잇의 기록은 2분38초12, 아모스의 기록은 2분38초49. 당연히 1위 기록보다 1분 가까이 늦었다.
주윗은 "레이스는 항상 마무리를 해야 한다. 아모스도 당황하는 모습이어서 일으켜 세우면서 함께 레이스를 끝내자고 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모스는 이후 심판 판독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 스케이트보드 여자 파크 결승. 선두를 달리던 오카모토 미스구(일본)가 마지막 순간 실수와 함께 넘어졌다. 이제 열다섯의 나이. 오카모토는 실수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눈물을 쏟았다.
오카모토가 경기를 마치자 함께 경쟁했던 포피 올슨(호주), 브라이스 웨스트스타인(미국) 등이 다가와 오카모토를 어깨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마치 우승자를 축하하는 것처럼. 오카모토는 "정말 고마운 순간"이라고 눈물을 닦았다.
이케에 리카코. 연합뉴스극복
# 사이클 셰인 브라스페닝스(네덜란드)는 2016년 리우 올림픽을 앞둔 2015년 갑자기 쓰러졌다. 심장마비로 응급 수술을 받아 고비는 넘겼지만, 선수 생활은 어렵다는 의사의 권고가 있었다.
하지만 브라스페닝스는 치열한 재활을 거쳐 재기에 성공했다. 여전히 약을 복용하는 상태에서 8월5일 도쿄 올림픽 사이클 여자 경륜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브라스페닝스는 "다시 선수로 뛸 수 있을지 확인하는데만 6개월이 걸렸다. 몸은 좋아졌지만 확신은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경기에 임했다"고 활짝 웃었다.
#수영 이케에 리카코(일본)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최고 스타였다. 수영 여자 6관왕에 오르며 여자 선수 최초 아시안게임 MVP를 거머쥐었다.
이후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던 2019년 2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수영은 남의 이야기였다. 항바이러스제를 매일 복용하면서 15kg이 넘게 빠졌다. 이케에는 도쿄 올림픽의 꿈을 접고, 2024년 파리 올림픽을 내다봤다. 하지만 회복 속도가 빨랐다. 계영 400m와 혼계영 400m 출전권을 얻었고, 혼계영 400m에서는 올림픽 결승 무대도 밟았다.
이케에는 "결승에서 계영 멤버로 수영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고 감격했다.
#태권도 남자 80kg 초과급 동메달리스트 인교돈(29, 한국가스공사), 유도 남자 100kg급 동메달리스트 조르조 폰세카(포르투갈)은 혈액암의 일종인 림프종을 이겨냈다. 케빈 맥도웰(미국) 역시 림프종을 극복하고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미국신기록을 세웠다.
이다빈.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인정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이동경(24, 울산 현대)은 남자 축구 조별리그 1차전에서 뉴질랜드에 0대1로 패한 뒤 크리스 우드의 악수를 거부하는 듯한 행동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복싱 남자 라이트헤비급 은메달을 딴 벤저민 휘터커(영국)는 시상식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지 않고 주머니에 넣은 뒤 눈물을 쏟았다.
# 서핑 남자 결승. 이가라시 가노아(일본)는 이탈로 페헤이라(브라질)에 밀려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페헤이라의 포르투갈어 통역이 없어 소동이 발생했다. 포르투갈어가 가능한 이가라시가 페헤이라의 통역으로 나서 기자회견이 무사히 끝났다. 이가라시는 은메달의 아쉬움 속에서도 승자를 인정했다.
페헤이라도 "땡큐 가노아"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 유도 남자 100kg급 결승. 조구함(29, KH그룹 필룩스)은 9분35초 혈투 끝에 한판패했다. 일본 유도의 심장인 부도칸(무도관)에서 일본 선수를 누르고 금메달을 따는 꿈은 좌절됐지만, 조구함은 울프의 손을 번쩍 들어주며 패배를 인정했다.
태권도 여자 67kg급 초과급 결승에 나선 이다빈(25, 서울시청)은 밀리차 만디치(세르비아)에 7대10으로 져 금메달을 놓쳤다. 하지만 이다빈은 기뻐하는 만디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승자를 예우했다.
# 양궁 남자 개인전 8강. 우승 후보 김우진(29, 청주시청)은 당즈준(대만)에 세트 스코어 4-6으로 패해 탈락했다. 앞서 김제덕(17, 경북일고), 오진혁(40, 현대제철)이 탈락한 상황. 한국 양궁의 금메달 5개 싹쓸이도 좌절됐지만, 김우진은 담담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스포츠는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다. 언제나 바뀔 수 있기에 충격이라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