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그래서, 협상력이 있습니까?"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이끈 경제 사절단이 지난달 21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무역·통상 정책을 총괄할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과 면담했을 때의 질문이었다고 한다. 어렵게 성사된 면담에서 단 40분만을 할애한 러트닉 장관은 대한민국 대표 기업인들을 다소 냉담하게 대했다는 후문이다. 질문에서 알 수 있듯, 트럼프 행정부의 관심은 오로지 '협상'이다. 관세 그 자체가 아니라 관세를 이용한 주고받기, 소위 말하는 '딜'(deal)이 목적임이 점점 명확해지는 가운데, 관세 대응은 곧 정부 협상력으로 환치된다.
트럼프 정부와의 관세 협상에 각 나라가 얼마나 사활을 걸고 있는지는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서는 지난 9일 '관세 유예' 축제가 열렸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로 관세를 두 달 연기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수만 명의 국민들이 모여 축제를 연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갖가지 굴욕을 당했던 캐나다는 관세 위협에 가장 잘 대응할 수 있는 마크 카니 전 캐나다은행 총재를 신임 총리로 세우기로 했다. 트럼프와 잘 싸워달라는 캐나다인들의 민심이었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는 어떤가. 혼돈의 한국 정치 상황이 트럼프 관세 위협의 심각성을 희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정부가 협상 돌파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다", "탄핵 상황 등을 보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려고 하는 것 같다"는 우려섞인 평가가 재계에서 들려온다.
권한 대행 체제에서 정부 협상력이 다소 떨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도 탄핵 심판 등의 여러 스케줄이 신경쓰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총대를 잡았다가는 후폭풍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며 자세를 낮추는 공직사회 분위기도 감지된다.
하지만 4월 초까지의 시간은 황금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상호 관세를 예고한 그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망설이는 사이에 협상의 골든타임은 날아간다는 것을 정부 부처와 정치권은 다시 새겨해야 한다. 트럼프 정부 앞 각 나라 대기줄은 어마어마하게 길다. 최적의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실제 미국 정부 인사들과 긴밀히 접촉하고, 주고받기를 해야할 황금같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산업통상자원부 제공다행히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통상 베테랑이다. 통상교섭본부장 출신인 안 장관은 지난달 26일~28일 방미에서 나름의 성과를 냈다. 안 장관이 이번 달에 또다시 미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11일 국무회의에서 "오직 국익만 생각하고 냉철하고 유연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며, 한미 양국이 상호 윈-윈(Win-Win)할 수 있는 합의점 마련에 모든 힘을 쏟아붓겠다"며 의지를 다졌다.
늦었지만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을 꾸려보려는 권한대행 정부를 향해 정치권이 이제라도 힘을 실어줘야 한다. 담판이 이뤄지기도 하는 통상 영역에서 어느 한쪽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협상이 이뤄질 수 없다. 아무리 첨예한 정치 상황일지라도 "외교에는 여야가 없다"는 공식을 정치권이 되새겨야 한다.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초당적으로 정부와 힘을 모아 관세 협상에 대비해야 한다. 정부가 어떤 시나리오로 관세 협상을 준비하고 있는지, 상임위 여야 의원들이 세세하게 보고받고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여야 지도부가 안덕근 장관을 비롯한 정부 대표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도 방법이다. 트럼프 정부의 살벌한 관세 칼춤 앞에서 망설이거나 편을 가를 시간은 없다. 아무리 국내 정치 상황이 혼란해도, 현실은 현실이다. 정부가 최대한 협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대국민 관심과 함께 정치권의 조력이 절실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