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편집자주]2020.5.25. 김용신 로직스 상무(글로벌고객지원팀장) 법정 증언 |
검사 "업무상 여러 중요한 내용이 있었을 텐데 자료를 지우라는 지시를 그냥 따라도 되는 것이었습니까?"
증인 "저도 (지시를) 이행한 한 사람으로서 회사 상황이 그렇게 (수사를 받을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에서…. 어떤 상황을 초래할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방어적인 측면이나 자기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직장인으로서는 개인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판단하고요. 일요일에 제 집에 친척이 온다고 해도 집안의 불결한 모습을 모여주기 싫어서 치우는 그런 사람이라…."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약 3년 3개월 만에 다시 검찰에 불려나온 지난 25일. 서울중앙지검 옆 서울고법 대법정에서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이하 로직스) 회계부정 의심 증거들을 공장 마룻바닥을 뜯어가며 숨겼던 삼성의 임원들이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1년 6개월째 수사가 끝나지 않은 본안사건과 달리, 이 증거인멸 사건은 벌써 지난해 5월 1심 재판이 시작됐고 12월에 판결도 선고됐습니다. 기소된 8명의 피고인은 모두 '유죄'였는데, 대리급 1명을 제외한 7명은 곧바로 항소해서 지난 3월부터 2심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이날은 2심 들어 처음으로 증인신문이 있었습니다. 일련의 증거인멸 행위에 가담했지만 기소되진 않은 김용신 로직스 상무가 첫 증인으로 나왔습니다.
김 상무는 증거인멸과 관련해 '친척이 집에 오기 전 집을 치우듯이 자기방어적으로 (우려되는) 자료를 삭제한 것'이라는 취지로 표현했습니다. '프로 직장인'의 변명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법률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함의를 내포한 말입니다.
형법 제155조는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은닉하거나 위·변조한 경우에만 처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관련 있는 형사사건이어서 증거를 없앤 것이라면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처벌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양철보 삼성바이오에피스(이하 에피스) 상무 등 2명을 제외한 피고인 5명은 지난달 14일 재판부에 이러한 취지의 새 의견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피고인들의 지위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피고인1(양철보)과 피고인2(이△△)는 에피스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증거인멸과 금감원 제출 자료 위조 등에 가담한 인물. 피고인3~7(순서대로: 백상현, 서보철, 김홍경, 박문호, 이왕익)은 삼성전자 미래전략실과 그 후신인 사업지원TF 소속의 고위 임원들로 증거인멸 계획을 수립하고 계열사에 지시한 혐의를 받습니다.)2020.05.25. 서울고법 형사2부 재판장 법정 발언 |
"4월 14일자 의견서에서 피고인3~7(백상현·서보철·김홍경·박문호·이왕익)의 변호인들이 '양철보와 김동중이 자기 사건의 자료를 인멸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교사에 따라 인멸한 것이 아니고 자기사건 정범으로서 (인멸)한 것이면 교사를 한 피고인들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이게 증거인멸의 정범인지 교사범인지 모호해서 증인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 것 같고 시간이 좀 걸려도 이 부분에 대해 계속 얘기를 해 볼 생각입니다." |
피고인 측에서 이처럼 '자기사건의 증거인멸' 논리를 전면적으로 들고 나온 것은 1심 판결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1심에서 검찰 공소사실이 대부분 인정돼 피고인들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딱 1개의 공소사실에 대해서만 무죄 판단이 나왔습니다.
바로 김동중 전무에 대해 미전실 고위급이던 피고인들이 증거인멸을 교사한 부분입니다. 김 전무는 2018년 5월 금융감독원이 로직스의 회계부정을 통보했을 당시 직접 해명 기자간담회를 진행했고, 이후 증거인멸 논의가 오간 '긴급대책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본안사건'의 직접 당사자로 검찰 수사를 받은 인물입니다.
1심 재판부는 "김동중은 긴급대책회의에 직접 참석해 자료 정리를 결정했다"며 "이미 (스스로) 증거인멸·은닉 범행이나 그 교사범행을 결의했던 것으로 보여 김동중에 대한 교사죄는 성립할 수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교사범은 타인에게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심어주고 이를 실제 저질렀을 때 성립합니다. 이미 당사자가 범행을 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교사범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대법원의 판례입니다.
1심 단계에서는 이 논리를 주된 변론무기로 쓰지 않았던 피고인들이 2심에 와서는 김동중 전무 뿐 아니라 양철보 상무에 대한 교사혐의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들고 나온겁니다. 검찰은 강하게 반발하며 '자기사건'이라 죄가 안 된다면, 본안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하는 꼴이라고 지적했습니다.
2020.05.25. 삼바 증거인멸 공판 담당 검사 법정 발언 |
"솔직히 말씀드리면 검찰 수사와 1심 과정에서 양철보와 김동중의 증거인멸 동기와 경위에 대해 '내가 처벌받을 수 있어서 지웠다'라고 한 진술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변호인들의 변론 취지는 이해하지만 실체적 진실에 배치됩니다. (법률적으로) 죄가 되냐 안되냐를 따지다보니 만들어낸 기교적인 논리로 보입니다." …중략…
"어찌됐든 이 논리대로 간다면 사업지원TF 쪽 변호인께서는 옆에 계시는 피고인 양철보가 본안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시는 건데요. 그렇다면 내가 회계부정 사건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의식했다는 것인데, 지금 양철보 피고인의 변호인들은 그 부분에 동의하지 않으시면 방어권 행사를 하셔야 합니다." |
검찰 측 발언이 끝나자 변호인 측은 "(본안사건) 죄를 인정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수사를 받을 여지만 있다면 그런 자료를 지우더라도 법이 처벌하지는 않고 있다"고 받아쳤습니다.
요새는 딱 '꼰대'가 되기 십상인 말이지만 아마도 피고인들 대부분이 '회사를 가족같이' 여긴 인물들이었기에 삼성에서 중요 보직을 맡게 됐을 겁니다. '회사의 시련은 나의 시련'으로 여기며 일사분란하게 대응활동을 한 것일 뿐이니 죄가 되지 않는다고 봐도 되는 걸까요?
다만 그 시련이 흔히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금감원의 회계부정 판단과 시민단체의 고발, 언론의 집중 보도 등으로 곧 수사가 개시될 것을 예상할 수 있었던 상황이라는 점이 중요해 보입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안타까운 것은 이날 이재용 부회장은 검찰 수사를 받으며 회계부정 혐의 등과 관련해 '보고받거나 지시한 적이 전혀 없다'는 취지로 부인했다는 겁니다. 그룹의 총수는 "남 일"이라고 하는데 직원은 "내 일"이라고 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입니다.
검찰은 이왕익·김홍경·박문호→백상현·서보철→양철보·김동중 등의 순서로 증거인멸이 '순차지시'된 점과, 윗선의 지시가 없었다면 로직스와 에피스에서 (자발적으로) 대대적인 증거인멸이 벌어졌을 리 없다는 논리를 더욱 강화할 방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