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 포스터. 판씨네마㈜ 제공
영화 '미나리' 스틸컷. 판씨네마㈜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정이삭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담백하면서도 솔직하게 그려냈다. 미화하지도, 덜거나 보태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말이다. 이민자 가족의 경험 속에 담긴 가족 이야기는 그렇게 모든 이를 아우르며 위로를 던진다.
'미나리'(감독 정이삭)는 희망을 찾아 낯선 미국 땅으로 이민을 선택한 한국인 가족의 따뜻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제이콥(스티븐 연)의 가족은 한국에서 낯선 미국, 그중에서도 남부에 위치한 시골 마을 아칸소로 떠나왔다. 병아리를 감별하던 제이콥은 가족들에게 뭔가 해내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 아칸소에 자신만의 농장을 가꾸기 시작한다.
아칸소에 도착하니 예상과는 달리 바퀴 달린 낡은 컨테이너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놀란 아내 모니카(한예리)는 그럼에도 다시 한번 제이콥의 결정을 따라준다.
그런 모니카는 자신을 위해, 그리고 아직은 어린아이인 큰딸 앤(노엘 케이트 조)과 막내아들 데이빗(앨런 김)을 위해 엄마 순자(윤여정)를 아칸소로 부른다. 한약이나 고추장, 멸치 등을 가방 가득 챙겨 온 순자는 미국 문화와 언어에 익숙한 한국 아이들에게 어쩐지 어색한 할머니다.
아이들에게 할머니 순자는 '한국 냄새'가 나는, 다른 할머니처럼 쿠키도 구워 주지 않는,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다. 이민 첫 세대가 느낀 혼란처럼 그 다음 세대 아이들이 겪는 문화적 혼란은 앤과 데이빗을 통해 드러난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판씨네마㈜ 제공
영화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온 이방인들 이야기이자, 한국과 미국 문화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어린 이방인들 이야기를 담았다. 때로는 감독의 시선으로, 때로는 데이빗의 시선으로 제이콥과 모니카 가족을 비춘다.
이는 감독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냈기에 가능한 시점이다. 데이빗과 제이콥 모두를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감독이기에 일정 정도 이야기 안에 자신을 담으면서, 때로는 거리를 두며 한 가족을 들여다보려 한다.
이러한 시점에 이어서 '미나리'는 과거의 단편을 감성적으로 담아내면서도 감정적으로 그날을 추억하지만은 않는다. 희망을 찾아 낯선 땅에 찾아온 가족들의 불안과 슬픔, 애정과 불협화음 등 모든 순간과 그 순간마다 얽힌 감정들을 정직하게 보여줄 뿐이다.
대개 추억을 반추할 때 지나치게 과거의 향수를 찾거나 혹은 아픔을 미화하며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나 '미나리'는 담담하면서도 담백하게 자신의 경험을, 이민자들의 경험을 그려낸다. 이러한 점이 '미나리'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미나리'는 척박함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자라나는 미나리 그 자체다.
제이콥의 가족을 뒤쫓는 카메라를 통해 가장 많이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이방인이 느끼는 감정들이다. 낯선 언어, 낯선 문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인인 제이콥과 모니카가 느끼는, 이질적인 존재를 대하면서 빚어내는 감정을 내내 만날 수 있다. 앤과 데이빗 역시 자신의 뿌리와 익숙해진 새로운 나라의 문화 사이에서 겪는 혼란,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품게 되는 감정 등을 대변한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판씨네마㈜ 제공
때때로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 아래에 펼쳐지는 자연의 모습은 거칠고 열악한 환경에 놓인 제이콥 가족을 둘러싼 사랑과 희망을 보여주는 듯하다. 종종 핸드-헬드로 보여주는 제이콥 가족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를 현실에 발붙이게끔 만든다.
미국을 향한 한국 이민자 가족을 다루지만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나리'는 단순히 제이콥 가족만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여느 평범한 가족이 가진 딜레마와 아픔, 불안과 그 모든 것을 이겨내게 만드는 가족애를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덕이다. 이는 한국과 미국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전 세계인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다.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낯선 나라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의 영화라는 점에서도 '미나리'는, 적어도 모든 이민자와 이방인들을 위한 위로를 담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낯설고도 익숙한 '미나리'에 많은 이가 찬사를 던지는 이유다.
영화 속 순자는 미나리에 관해 아무 곳에서나 잘 자란다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두 먹을 수 있는 식물이라고 말한다. 미나리는 결국 제이콥 가족으로 대표되는 모든 이민자를 비유함을 알 수 있다.
순자는 또한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낫다고, 숨어 있는 게 더 무섭다고 이야기한다. 제이콥과 모니카, 순자와 앤, 데이빗이 다시금 가족이란 이름으로 뭉쳐 앞으로 나아간 것은 그들이 불안을 숨기지 않고 밖으로 꺼내 활활 태웠기 때문이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판씨네마㈜ 제공
이는 영화 밖에서 '미나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어느 영화보다 미국적인 이야기를 담은 미국 영화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 지금도 미국 사회에서 이방인 같은 느낌을 받는 이민자들 모두의 이야기를 그린 미국 영화다.
'미나리'가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 부문 후보로 올라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는 것은 영화 안팎으로 여전한 미국 내 이민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자유의 나라이지만 그 자유가 일부 사람들에게만 한정됐다는 점, 누구나 아메리칸 드림을 좇을 수는 있지만 누구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없다는 미국의 허상을 우리는 '미나리'의 외적 논란을 통해 만나고 있다.
어쩌면 미나리야말로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을 표현하기에 적확한 단어일지 모른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무성하게 자신을 키워나가는 미나리처럼, 영화 '미나리' 역시 비(非)백인·비영어권 문화를 향해 여전히 드높은 벽을 세운 미국 사회에서 초록 잎 군락을 형성하길 바란다.
115분 상영, 3월 3일 개봉,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