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고생했어요' 김연경이 8일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2020도쿄올림픽 여자 배구 세르비아와 동메달 결정전에서 아쉽게 메달이 무산된 뒤 안드레아 비아시올리 코치를 안고 격려해주고 있다. 이한형 기자
김연경(33·중국 상하이)이 올림픽 인터뷰에서 눈물을 보인 것은 적어도 제 기억에는 처음입니다. 2012년 런던부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그리고 올해 도쿄까지 세 번 올림픽에 나선 김연경. 그가 뛴 모든 경기는 아니지만 중요한 경기는 거의 현장에 있었던 만큼 눈시울이 붉어진 김연경을 본 것은 낯설었습니다.
그만큼 쾌활하고 특유의 털털한 성격으로 김연경은 비록 앞선 올림픽에서 아쉽게 메달이 무산됐지만 인터뷰에서 눈물을 보이진 않았습니다. 첫 올림픽이던 런던 대회에서 김연경은 미국과 4강전에서 아쉽게 패배를 당한 뒤 "눈물이 좀 나려고 했다"면서도 "하지만 경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3, 4위 결정전이 끝나고 울겠다"며 의연한 자세를 보였습니다.
일본과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대표팀은 아쉬운 패배를 안았습니다. 당시에도 김연경은 인터뷰에서 "이기고 나서 울려고 했는데 지금은 눈물이 안 난다"며 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어 "올림픽을 통해 우리도 많이 성장했고 36년만의 4강 진출만으로도 뜻깊은 올림픽이었다고 생각한다"면서 "4년 뒤에는 더 좋은 모습을 보이겠다"고 다짐했습니다.(물론 김연경은 이후 경기가 끝나고 라커룸에서는 많이 울었다고 고백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취재진과 인터뷰에서는 눈물은 흘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 박용성 대한체육회장 간담회 취재를 갔던 터라 배구장 현장에 있던 회사 후배 기자에게 전해들었습니다.)
절치부심 메달을 다짐했던 리우에서도 김연경은 진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4년 전 일본에 당한 아픔을 통쾌한 승리로 설욕했지만 8강전에서 네덜란드의 벽에 막혔습니다. 당시 인터뷰에서 김연경은 "원래 경기에 져도 많이 울진 않는다"면서 "많은 사람 앞에서 울진 않는다"고 했습니다. "라커룸에서 선수들을 보면 울 수도 있겠는데 지금은 눈물이 안 나네요"라고 했지만 쿨한 표정으로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을 나섰습니다.
김연경은 자신에게 외신 기자들의 질문이 몰려 시간이 부족했던 한국 취재진이 더 질문하려는 것을 대회 관계자가 제지하자 분연히 나섰습니다. 관계자들을 오히려 제지하며 충분한 문답 시간을 주는 배려심도 보였습니다.(이번 대회에서도 김연경은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이 영어 답변을 너무 오래하자 "국내 취재진에게 통역을 해줘야 한다"며 재치 있게 눈치를 주기도 했습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당시 김연경의 인터뷰 모습. 노컷뉴스그랬던 김연경이 끝내 인터뷰에서 눈물을 보인 겁니다. 자신의 마지막 올림픽, 마지막 경기. 그토록 바랐던 메달이 눈앞에 보였지만 눈물 속에 내줘야 했던 상황.
그래도 경기 직후 김연경은 승자에 대한 축하가 먼저였습니다. 해외 무대에서 함께 뛰었던 브란키차 미하일로비치가 달려오자 안아주며 격려했고 세르비아 선수, 스태프와 악수를 나눴습니다. 이후 주장답게 동료와 후배 선수들을 안아주며 다독였습니다. 우는 선수들에게 "너희는 충분히 자격이 있다며 웃으라"는 위로를 전했고, 코칭 스태프와 함께 마지막 올림픽을 기념하는 사진도 찍었습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 참았던 눈물이 결국 흘러 내린 겁니다. 먼저 진행된 방송사 인터뷰에서 연신 눈물을 닦아낸 김연경은 이후 진행된 믹스트존 인터뷰에 나섰습니다. 침울한 표정으로 들어선 김연경은 "결과적으로 아쉬운 경기가 된 것 같고, 어쨌든 여기까지 온 거에 대해서는 너무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기분 좋다고 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밝게 인터뷰에 나섰던 김연경은 이날만큼은 "머리 속에 하얗다"면서 "아무 생각이 안 나서 대답이 잘 안 나온다"고 했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데 대해 김연경은 "고생한 것에 대한 생각도 나고 해서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방송 인터뷰에서 한번 감정을 풀어냈지만 김연경은 자주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참는 모습이었습니다. 대표팀은 이번 올림픽에 앞서 5주 동안 이탈리아에서 열린 국제배구연맹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 출전 등 4개월여를 대회 출전과 준비에 매진했습니다. 자가 격리와 코호트 훈련 등 외출, 외박 하루 없는 강행군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김연경은 하고 싶은 일을 묻자 "이제 밖에 나가서 가족과 식사하는 소소한 일상 생활"이라고 했겠습니까?)
김연경이 8일 도쿄올림픽 세르비아와 동메달 결정전 뒤 믹스트존 인터뷰에서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을 참는 모습. 김연경이 인터뷰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도 거의 처음 보는 일이다. 도쿄=노컷뉴스메달은 없었지만 성과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김연경과 대표팀은 한국 여자 배구의 힘을 전 세계에 알렸고, 불굴의 투혼으로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습니다. 김연경은 "이번 대회는 많은 관심 속에서 올림픽을 치렀는데 너무 즐겁게 배구를 했다"면서 "조금이나마 여자 배구를 알릴 수 있어서 기분 좋기도 하고, 정말 꿈같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며 비로소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특히 주축이던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의 학교 폭력 논란에 따른 이탈이라는 어려운 상황에도 4강이라는 값진 성과를 냈습니다. 김연경이 "어느 누구도 사실 기대하지 않았던, 우리들조차도 사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했는데 (동메달 결정전에) 올 수 있게 돼 기분 좋게 생각하고 경기는 후회 없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이제 김연경은 "오늘이 국가대표로 뛰는 마지막 경기가 되지 않을까"라며 16년 태극 마크 생활을 마무리할 뜻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 뜨거웠던 선구자 정신은 이어질 겁니다. 양효진(32·현대건설)은 "연경 언니가 19살, 20살 때 '대표팀 환경이 좋아지려면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고 했는데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정말 놀라고 신기했다"면서 "지금은 대표팀 환경이 매우 좋아졌는데 연경 언니가 앞장서서 변화를 이끌었다"고 말했습니다.
김연경도 "이번 경기를 통해서 선수들이 앞으로 해야 할 미래의 방향들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면서 "어쨌든 여기까지 끌어올린 여자 배구를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습니다. 이어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정도로 엄청 무거운 무거우면 무겁다 생각하고 큰 자부심과 영광스러운 자리라 생각한다"며 특별한 국가대표의 사명감과 의미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여자 배구는 물론 한국 배구 전체, 또 세계 배구 역사에 남을 위대한 선수의 마지막 올림픽. 마지막 경기 취재와 기사 작성을 마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미디어 센터 지붕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올림픽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봤던 김연경의 눈물은 올림픽 마지막 날 내린 비와 함께 전설이 되어 도쿄를 적시고 있었습니다.
2005년 CBS배 전국 남녀 중고 배구 대회에서 한일전산여고 김연경이 CBS노컷뉴스와 인터뷰한 모습. 당시 김연경은 17살이었다. 노컷뉴스P.S-문득 회사 서버에서 김연경의 기사를 검색하다 보니 16년 전인 2005년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당시 한일전산여고 시절의 김연경이 제 16회 CBS 전국남녀 중·고배구대회에 출전해 인터뷰한 기사였습니다.(물론 당시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던 제가 쓴 기사는 아닙니다.)
당시 박기주 한일전산여고 감독은 "여자 배구 사상 이런 대형 선수가 나오기 힘들다"면서 "앞으로 배구 중흥을 이끌 매우 우수한 선수다"라고 극찬했습니다. (과연 월드 스타 김연경을 길러낸 스승은 선견지명이 있었습니다.)
이후 김연경의 당찬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힘들 때 주로 친구들과 숙소에서 수다 떠는 것으로 해소한다. 연예인 중에는 조인성을 좋아한다. 멋있으니까…(웃음)"이라는 여고생다운 내용도 있지만 "여자 배구계가 침체돼 있는데 어떤 기분이 드나?"라는 질문에 "경기장이 썰렁하면 힘이 빠지는데 좀 더 많은 팬들이 찾아줬으면 좋겠다"는 대견한 발언도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질문과 답변이 의미심장합니다. 김연경은 "앞으로 꿈이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올해 학교를 졸업하고 실업팀에 가서 여자 배구를 증흥시키고 싶다"면서 "국가대표가 돼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도 나의 꿈"이라고 합니다.
16년 전 17살 김연경의 인터뷰. 그 말처럼 김연경은 자신의 꿈을 120% 이뤄냈습니다. 고교 시절부터 저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양효진을 놀라게 했던 다짐으로 한국 여자 배구를 바꿔놓은 겁니다. 처음 태극 마크를 달았던 2005년, 김연경이 한국 여자 배구와 이뤄온 16년의 전설은 그렇게 시작됐던 겁니다.
이제 누가 그 전설을 이어갈까요? 이 레터를 마무리한 도쿄의 밤 하늘은 말끔하게 비가 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