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인천시 부평구 미얀마 국민통합정부(NUG) 한국대표부 사무실에서 한 관계자가 아웅산 수지 전 국가자문역을 비롯한 미얀마 민주화 운동 주요 인사들의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주영민 기자"한국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모범이 되는 국가입니다. 민주주의가 흔들릴 때 국민들이 보여 준 용기는 찬사받아 마땅합니다. 이제 미얀마의 민주주의에도 관심 가져주길 바랍니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 24일 인천 부평구 미얀마 국민통합정부 한국대표부에서 만난 원퍼마웅 사무장은 12·3사태를 지켜보며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부러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고 말했다.
4년 전 한국과 비슷한 이유로 계엄령과 쿠데타를 겪으면서 내전 상황에 빠진 미얀마의 상황이 안타깝지만 한국은 국민과 정치인들의 용기로 계엄령을 재빨리 해제하고 평화를 되찾은 게 부럽다는 의미다.
원퍼마웅 사무장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미얀마 내전 사태에 관심을 갖고 국민통합정부를 지지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재한 미얀마인들이 2023년 1월 29일 서울 용산구 주한 미얀마대사관 앞에서 군부 독재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연 뒤 행진하는 모습. 미얀마 NUG 한국대표부 제공미얀마 군부, 부정선거 의혹 제기하며 정권 찬탈…4년째 내전 중
미얀마 국민통합정부 한국대표부에 따르면 미얀마 군부는 2021년 아웅산 수지 국가 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총선에서 압승하자 새 의회 개원일인 같은 해 2월1일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다. 당시 군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의사당을 장악하고 수지 고문을 비롯해 주요 정치인들을 구금했다.
이에 미얀마 국민들은 반군부 시위를 벌이며 저항했지만 군부는 폭력적인 진압으로 대응했다. 미얀마 군부는 최근까지 61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이 법령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 따르면 지금까지 미얀마에서 반군부 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인원만 공식적으로 2만명이 넘었고, 사형 집행이 200여명, 사망자는 6천여명을 넘었으며, 사망자 가운데 700여명은 미성년자로 파악됐다.
이후 저항세력은 민족통합정부(National Unity Government, 이하 NUG)를 구성한 뒤 시민방위군(이하 PDF)를 발족해 4년째 내전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미얀마 내 330개 도시 가운데 144곳은 NUG가, 107곳은 군부가 장악했다. 나머지 79곳은 접전 중이다.
2021년 8월 문재인 정부가 당시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미얀마 NUG를 공식외교채널로 인정해주셔서 미얀마 국민들을 구해주세요" 제목의 글에 26만8천여명이 서명해 답변서를 게시한 화면 캡처한국 정부 "미얀마 NUG와 소통" 약속…인도적 차원 비자 발급도
NUG는 한국을 포함해 일본, 호주, 프랑스, 영국 등 10개 국가에 대표부를 설립하고 각국의 연대를 요청하고 있다. NUG가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대표부를 설립한 국가는 한국이다. NUG는 2021년 8월 미얀마를 대표해 외교 활동을 맡을 특사를 임명하고, 인천에 사무실도 마련했다.
각국에 파견된 NUG 대표부들은 전 세계에 미얀마 군부 독재의 부당함을 알리는 동시에 자국 PDF의 군자금 지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유엔은 2021년말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미얀마 군부를 회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2022년 12월 2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얀마 군부의 폭력 중단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내전 초기 대한민국 역시 NUG와 적극 소통했다. 2021년 7월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미얀마 NUG를 공식외교채널로 인정해주셔서 미얀마국민들을 구해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와 26만8천여명이 서명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앞으로도 미얀마 국민들의 염원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태가 해결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여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NUG를 포함한 주요 당사자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우리 정부는 내전으로 본국에 돌아가기 어려운 미얀마인들을 위해 인도적 거주 비자(G-1-99)를 부여했다. 이 비자를 받은 노동자, 유학생, 단기방문자들은 과거에 부여된 비자가 만료됐어도 한국에 머무를 수 있다. 해당 비자를 받은 재한 미얀마인은 지난해 11월30일 기준 6천명을 넘었다.
지난해 5월 광주에서 열린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행사에서 미얀마 국민통합정부(NUG) 한국대표부 얀나이툰 특사(오른쪽 첫번째)와 NUG 외교부장관 등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함께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 표현인 '세 손가락 경레'를 하며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미얀마 NUG 한국대표부 제공주한 미얀마대사관, 민주화운동 인사 강제송환 추진
그러나 최근 우리 정부와 미얀마 NUG 사이에서 갈등의 골이 커지고 있다. 최근 한국에 체류 중인 미얀마 민주주의 운동 인사들이 잇따라 미얀마 강제송환과 숙청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주한 미얀마대사관은 최근 인도적 거주비자(G-1-99)와 방문동거비자(F-1)를 부여받은 재한 미얀마인들을 반군세력으로 간주하고 이들의 이름을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리거나 여권 효력을 강제로 상실시켜 자국으로 강제송환하고 있다. 송환된 이들은 내전을 벌이고 있는 미얀마로 옮겨져 숙청되거나, 강제 징집돼 민주화 군에게 총구를 겨눠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미얀마 군부는 지난해부터 만 18~35세 남성과 만 18~27세 여성들은 2년간 군 복무를 의무화하는 병역법을 시행하고 있다. 이 병역법은 군부가 선포한 국가비상사태 체제에서는 복무 기간이 5년까지 연장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2021년 5월 28일 당시 박범계 법무장관이 인천 부평구 미얀마인 밀집지역에서 미얀마 민주화운동 관련 도움을 호소하는 선전물을 보는 모습. 법무부 제공 또 군부는 지난 24일부터 강제 징집 대상자가 사전 허가 없이 출국할 수 없도록 법을 개정했다. 군부가 민주화 운동 세력으로부터 열세를 보이자 시행한 조치다.
주한 미얀마대사관은 또 여권이 만료된 미얀마인들에게 내전 중인 자국으로 돌아가 여권을 갱신하는 대신 민주화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작성하고 군부 지원금 60만원을 내면 대사관에서 여권 유효 기간을 연장해주고 있다.
재한 미얀마인 관련 단체들은 최근 "적법한 여권을 가지지 못하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체류자격을 박탈당하고 미등록체류자로 전락해 강제퇴거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악용해 국민을 탄압하고 있다"며 주한 미얀마대사관을 강력 규탄했다.
지난달 18일 하이코리아 홈페이지에 게시된 '미얀마 여권 관련 공지' 화면 캡처"도와 달라" 요청 외면한 한국 정부…"마음 아파"
이와 관련해 NUG 한국대표부는 지난해 5월부터 우리 외교부에 '재한 미얀마인들이 한국 체류기간 연장에 유효한 여권을 준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NUG 한국대표부의 직인으로 보증한 여권을 인정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지난달 18일 '미얀마 여권 관련 공지'를 통해 "NUG 한국사무소의 직인이 날인돼 유효기간이 연장된 미얀마 여권은 유효한 서류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지했다.
NUG 한국대표부 소모뚜 사무처장은 "한국 정부는 자국민을 학살하고 전 세계가 전쟁 범죄자로 치부하는 대사관의 조치는 합법,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국민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NUG 한국대표부의 요구는 불법이라고 판단하는 듯하다"며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위기에 겹쳐 미얀마의 민주주의도 치명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며 "미얀마 민주주의의 평화와 안정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고 약속했던 대한민국 정부의 현명한 판단과 지지를 소망한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