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는 일본으로 망명 후 고초를 겪고, 두 아들은 유신 시절 간첩으로 몰려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 기구한 운명의 삼부자가 있다.
막내아들은 광주를 찾았다가 우연히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해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 한 아버지의 독립 유공 서훈을 신청하려 했지만, 명예회복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 때 간첩으로 몰렸던 형제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주학생운동 '마중물' 아버지…90년 만에 명예회복재일교포 허경민(63)씨가 아버지의 독립운동 활동을 알게 된 건 지난 2013년 한국 여행 도중 광주학생운동기념관을 찾으면서다.
기념관 한쪽에서 우연히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사진과 대조해 광주일고(옛 광주고보) 재학 사실을 확인한 것.
아버지 허창두씨는 1928년 '동맹휴교' 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돼 이듬해 퇴학당했다.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히는 광주학생운동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경찰에 쫓기다 일본으로 망명한 허창두씨는 오사카에 정착해 갖은 일을 하며 6남매를 키웠다. 아들 허경민씨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면서도 "항상 고국을 그리워하셨다"고 회상했다.
1년 뒤 광주일고 명예졸업장을 대신 받게 됐지만, 뒤늦게라도 찾고 싶던 아버지의 명예회복은 더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독립유공 서훈에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서였다.
◇형은 간첩 몰려 옥살이…40년 지나서야 '무죄' 확정허씨 형 허경조(76)씨는 박정희 정권 시절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조작 사건(11·22 사건)' 피해자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 수사 책임자였다.
아버지 권유로 한국 유학길에 올라 서울대 의대에 다니던 형은 유신 정권의 한복판인 1975년 10월 느닷없이 찾아온 중정 수사관들에 의해 남산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고문은 계속됐고 형은 간첩 혐의로 기소돼 1심과 2심에서 징역 3년 6개월 형을 받았다. 대법원 파기환송 후 고등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1년 3개월 넘게 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형을 인권침해사건 피해자로 인정했다. 국가 배상 판결을 진행해 대법원서 최종 무죄 선고가 난 게 2015년 6월이다. 40년 동안 누명은 쓴 대가로 형이 받은 보상금은 1억원 정도였다.
◇"한국은 비극이자 희망…한국 국적 안 바꿀 것"
고대 의대를 다녔던 허씨 본인도 간첩 조작단 사건으로 남산 조사실에 끌려갔다. 허씨는 "차가운 금속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계속 들렸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일주일 만에 풀려난 허씨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간첩단 사건 피해자 구명 운동을 벌였고,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는 외신을 모아 일본 최초로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고 한다.
여전히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허씨는 최근 다시 한국을 찾아 미뤘던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신청을 준비 중이다.
허씨는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한국은 비극이자 희망의 원천"이라고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일본으로 망명 가 아직도 명예를 회복하지 못 한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조국으로 유학 와 간첩으로 몰렸던 형제의 기구한 운명의 실타리가 90년 만에 풀릴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