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제공일본 정부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 등 우리 정부에서도 최근 주장하고 있는, 2018년 확정된 우리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이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논리가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자료가 공개됐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체결될 당시 한일 모두 그렇게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 수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6일 외교부가 생산 뒤 30년이 지나 비밀해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1991년 8월 주일한국대사관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후 보상 국제포럼' 내용을 외무부 본부에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 정무수석비서관이었던 민충식 전 수석은 "1965년 소위 '청구권' 협정에 대해 한일 양국 정부간 및 국민간 인식의 차가 크다"면서 "개인의 청구권이 정부간에 해결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당시(1965년) 교섭 대표간에도
협정은 정부간 해결을 의미하며 개인의 권리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암묵적인 인식의 일치가 있었다"며 "당시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도 동일한 견해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발언했다.
외교부 제공타나카 히로시 교수도 "일본 정부는 아시아 지역 국가와의 보상 문제가 정부간에 해결되었으므로 모두 종결되었다는 입장이나, 시베리아 억류 일본인에 대한 유족들의 대소련 정부 보상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하는 등 모순을 보이고 있다"며 "
일본 정부는 1956년 일소 공동선언시 배상, 보상이 포기되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간의 배상, 보상이 포기된 것이지 개인의 권리는 해당 선언에 의해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일본이 우리에게 들이대는 논리와 180도 다른 셈이다.
1981년 당시 백충현 교수의 발언 내용. 외교부 제공서울대 법대 백충현 교수도 이 자리에서 "1965년 협정은 당시 국내의 미묘하고도 급박한 상황 속에서 체결된 바 법적, 외교적 형식을 갖추기는 하였으나, 36년간의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최종적이고 완전히' 해결되었느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인식이 일치할 수 없었다"며 "
일본의 가해 행위가 존재하고 직간접적인 피해자가 생존해 있으며 피해자의 대다수가 침해된 권리를 구제받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언급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이야기다.
백 교수는 "일본의 역사적 책임은 복합적 책임 즉 정치적, 법적 책임이며, 전후 국내적으로 취한 차별조치 또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 65년 청구권 협정의 1개 조항('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히')을 근거로 논의되지도 않았고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던 부분까지 일괄타결되었다고 확대주장하는 것은 과오"라며 "65년 협정에서 재산권적 청구권이 해결되었다고 하는 바,
피징용이나 사할린 억류는 그 자체가 비재산적 피해이므로 비재산적 청구권리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합뉴스반면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 한일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2018년에 그동안 정부의 입장, 정부의 1965년 협정 해석과 다른 내용의 판결이 선고됐다"고 언급하며 우리 대법원의 판결이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일본의 논리와 결이 같은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보다 앞선 2022년 9월 한덕수 국무총리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만난 뒤 2018년 강제동원 배상 판결 확정이 '국제법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기자들과 만나 언급했었다.
주오사카 총영사를 지냈던 북한대학원대 조성렬 초빙교수는 "대법원 판결 내용을 보면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다뤘다'고 했기에 일본의 주장처럼 이 문제를 청구권 협정에서 해결할 수는 없다"며 "한덕수 국무총리의 발언은 그러한 일본 측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가해자인 일본이 갑, 피해자인 한국이 을이 되는 주객전도가 벌어졌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6일 오전 광주 서구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사무실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가 '제3자 변제'를 골자로 한 정부의 징용 피해배상 문제 해결 방안 발표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