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한국의 유망주 군단이 전 세계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개최된 세계청소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야구계는 당시 우승 주역들이 훗날 한국 야구를 이끌어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추신수, 이대호, 정근우, 김태균 등 무럭무럭 성장한 '에드먼턴 키즈'들은 국내와 해외 무대를 가리지 않고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같은 해 농구계도 비슷한 꿈을 꿨다. 한국 남자농구를 이끌어 갈 황금세대의 등장에 기대와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2000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국제농구연맹(FIBA) 18세 이하(U-18) 아시아선수권 대회 결승전. 한국 U-18 대표팀은 당시 부동의 아시아 최강으로 평가받았던 중국을 120-92로 완파하고 정상에 올랐다.
28점차 승리. 각급 대표팀을 통틀어 한국 농구가 중국을 그토록 크게 이긴 경기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대회 MVP를 차지한 방성윤, 골밑의 기둥으로서 중국의 높이에 맞섰던 김일두 등 기라성같은 유망주들이 훗날 한국 농구의 버팀목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했다.
그해 대표팀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당대 아마추어 최고의 선수였던 휘문고의 방성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 방성윤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을 때도 많았던 선수가 있었다.
3일 오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한 30대 남성이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살해하고 시신을 암매장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것.
소식을 접한 농구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경찰에 체포된 A씨가 바로 13년 전, 한국 남자농구를 설렘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전직 농구 선수 A씨는 2001년 고려대로 진학했다. 방성윤이 라이벌 학교인 연세대로 진학하면서 대학농구의 르네상스가 도래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고려대 진학 이후 A씨의 모습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가 엄한 선수단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시쳇말로 '소풍갔다'고 표현하는 선수단 이탈도 수차례 있었다.
그러나 기량만큼은 탁월했다. 고려대와 연세대 농구부에게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경기로 여겨지는 정기전이 있다. 고려대는 코트 밖에서 방황하는 A씨를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정기전이 열릴 때마다 그를 호출하려고 애썼다. 몸 관리를 못해도 그가 있는 코트와 없는 코트는 차이가 컸다.
192cm의 장신 가드. 코트를 넓게 보는 시야와 패스 감각은 전성기 시절의 김승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는 게 농구계의 중론이다. 한 관계자는 "만약 제대로 성장했다면 한국의 매직 존슨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능 자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놀라웠다.
A씨는 고려대에서 중퇴하고 농구와 담을 쌓았지만 일반인 자격으로 참가한 2005년 프로농구 신인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8순위로 지명받았다. 당시 대구 오리온스(현 고양 오리온스)는 어린 시절 그가 보여준 재능 하나만 믿고 귀한 1라운드 지명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프로에서도 팀을 이탈하는 돌발 행동을 해 결국 임의탈퇴 신분이 됐다. 2006년 울산 모비스가 도움의 손길을 뻗쳐 못다핀 농구의 꿈을 피우는듯 보였다. 국군체육부대(상무)까지 다녀왔지만 전역하자마자 다시 코트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