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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일반

    "친일 후손, 앞으로 용기 갖고 소송할 것"

    친일파 재산 여부, 후손이 입증하지 않고 국가가 입증하라니

    - ‘친일대가가 아니고 선산’ 후손 주장 받아들여
    - 이진호, 중추원 고문 지낸 대표적 친일파
    - 일제 때 토지조사사업위원장 지냈는데 의구심
    - 재산조사위원회 상설화해서 구심점 삼아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3년 11월 20일 (수) 오후 6시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손영실 변호사


    ◇ 정관용> 친일파 이진호의 후손이 국가에게 박탈당한 토지를 다시 돌려받게 됐네요. 오늘 서울고등법원에서 이런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셨던 손영실 변호사 연결해 봅니다. 손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 손영실> 네, 안녕하십니까?

    ◇ 정관용>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활동이 언제 있었죠?

    ◆ 손영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년간 있었습니다.

    ◇ 정관용> 이게 특별법에 의해서 이루어졌었죠?

    ◆ 손영실>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래서 모두 몇 건을 찾아서 몇 건을 박탈했습니까?

    ◆ 손영실> 그 정확한 통계적 수치는 제가 가지고 있지는 않은데요. 그때 당시에 300억 상당의 토지로 환수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300억?

    ◆ 손영실> 네.

    ◇ 정관용> 건수로는 대략 몇 건인지 혹시 기억 안 나세요?

    ◆ 손영실> 글쎄요. 그건 확인을 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그렇게 해서 박탈당한 사람이 이진호의 후손입니다. 이진호는 어떤 사람이죠? 어떤 친일 활동을 한 사람입니까?

    ◆ 손영실> 그 이진호는 대표적인 친일파입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됐던 을미사변에도 관여를 했고요. 예로 1909년도에 평안남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고종황제가 방문하는 길에 일장기를 달게 했습니다. 이를 거부한 학교 교장을 구속하고 징계했다는 신문기사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토록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기 때문에 1912년부터 1918년까지 경상북도 장관과 전라북도 장관을 지냈습니다. 일제시기 말년에는 한국인으로서 최고의 지위라고 할 수 있는 중추원 고문과 귀족원 의원도 역임한 적이 있습니다.

    ◇ 정관용> 그런 친일행적을 확인하고 재산을 조사해서 경기도 고양 벽제에 있는 임야 2만 3000여 제곱미터, 그걸 박탈했던 거죠?

    ◆ 손영실> 네.

    ◇ 정관용> 그런데 오늘 법원은 이걸 다시 돌려줘야 한다, 뭐라고 그러면서 그렇게 돌려줘야한다고 그랬죠?

    ◆ 손영실> 이게 친일 행위 대가로 취득한 땅이 아니라고 본 거죠. 이거를 임야 위에 이진호 선대의 분묘가 한 두 개 정도 있는데요. 이거를 들어서 이 사람들이 선산으로 내려온 땅이지 일본 놈들한테 받은 땅이 아니다, 이런 취지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친일 행위 대가로 받은 땅이라고 볼 수가 없다?

    ◆ 손영실>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원래부터 이진호의 재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거예요?

    ◆ 손영실> 그렇죠.

    ◇ 정관용> 그러면 원래 재산이었는지 친일 행위 대가로 받았는지를 그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서는 조사 안 했나요?

    ◆ 손영실> 물론 조사를 다 마쳤습니다. 그런데 우선 친일재산 환수법에서 그 친일파가 일제시기에 취득한 땅은 친일재산으로 추정을 하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 추정 규정이 물론 있기도 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물론 충분한 조사를 했고요. 그런데 지금 이진호가 문제가 1912년부터 18년까지 그 경상북도와 전라북도 장관을 지내면서 토지조사사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을 했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이라는 게 기존에 있던 조선시대의 땅들을 다시 지번으로 구획을 나누고 이제 누구의 소유다 이렇게 장부에 적는 작업입니다. 등기제도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과정, 절차는 그냥 일반 민간인들이 ‘이 땅은 내 땅이요’라고 신청을 하면 토지조사위원회에서 조사를 해서 ‘그래, 이거는 네 땅이다, 이건 너 땅이다’ 이런 식으로 확인을 해 주고 결정을 해 주는 그런 작업을 하는 곳입니다.

    ◇ 정관용> 소유권을 하나하나 확정해 준다, 이 말이군요.

    ◆ 손영실> 네, 확정을 해 주고 그러면서 새로 창출이 되기도 하고요. 또 신고 안 하는 땅들이 있으면 그 땅은 신고하는 사람의 땅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리, 토지조사위원회에서 이진호가 그 위원장을 역임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그 조사사업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고요. 그 과정에서 지금 1914년과 17년에 토지 사정이 됐다고 하는 이 땅들을 그 토지가 친일 대가가 아니라고 볼 수가 있는지 그 부분은 좀 의문스럽기는 합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토지조사사업위원장 맡으면서 ‘이 땅은 이진호 내 땅이다’라고 하는 그 결정도 스스로 한 거 아니겠습니까? 위원회에서.

    ◆ 손영실> 네, 그렇죠.

    ◇ 정관용> 그런데 이 일제시대에 취득한 땅은 친일의 대가로 본다라고 하는 게 법적 근거잖아요?

    ◆ 손영실>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일제시대 때 취득했다고 하는 근거가 바로 1914년이나 17년에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그거로군요.

    ◆ 손영실> 네. 그렇죠.

    ◇ 정관용> 그런데 그 이전에 이 땅을 샀었는지 안 샀었는지라고 하는 것은 이진호 후손이 스스로 입증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 손영실> 그 부분에 대해서 많은 친일 소송에서 이 규정 자체가 위헌이라는 주장은 참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헌법재판소에서는 이거는 위헌이 아니고 합헌적인 규정이라고 했고요. 개인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가 많지 국가가 가지고 있는 자료가 많지는 않을 거 아니겠습니까?

    ◇ 정관용> 그렇죠.

    ◆ 손영실> 그리고 또 이거는 좀 더 거대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반민족행위처벌법의 반민특위법에서는 친일파 후손들의 땅을 그 자신의 땅뿐만 아니라 유산까지 몰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반민특위 활동으로 그 처벌받은 친일파 없잖아요. 그런 면에서 그런 추정된 역사적 의미도 담고 입증 근거의 문제까지 담아서 추정 규정을 만들어놨는데. 이번 판결에서는 그 추정 규정을 너무 쉽게 후손이 입증을 해야 되는데 너무 쉽게 깨뜨리고 국가가 입증을 해라, 그런 식으로 판단을 내린 거죠.

    ◇ 정관용> 그러니까 친일파 후손들이 ‘이거는 조선시대 때부터 우리 땅이다’라고 하는 걸 입증할 의무를 주지 않고. ‘정부가 이건 친일 대가로 받았다라는 걸 분명히 입증해라’ 이렇게만 했다는 말이군요?

    ◆ 손영실> 그렇죠. ‘이게 분묘가 있고 이러저러하니 선산 같은데. 그러면 피고, 너 정부가 한번 입증을 해 봐라’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린 거죠.

    ◇ 정관용> 피고가 아닌 정부가?

    ◆ 손영실> 네, 그 피고가 바로 정부가 됩니다.

    ◇ 정관용> 그렇죠. 그러니까 소송을 제기한 그 친일파 후손에게는 입증 책임을 안 줬다는 거 아닙니까?

    ◆ 손영실>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 정관용> 이와 비슷한 소송이 또 있죠?

    ◆ 손영실> 예, 비슷한 소송이 과거에 참 많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친일파 그 땅들이 경제 발전을 하면서 다 팔아먹고 없고요. 이런 식으로 임야에 선산 같은 것만 다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땅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소송에서 ‘여기에 우리 분묘가 있고 우리 선대가 어쩌고저쩌고 하니까 이 선산이 친일파 대가가 아니오’라고 주장을 다들 했었어요. 그런데 그 대부분의 소송에서는 법원이 그래도 그 추정 규정을 들어서 ‘입증이 좀 부족하다 내지는 그걸로 입증 안 된다’ 해서 국가의 손을 많이 들어줬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조금 이례적으로 그거를 좀 깬 듯한 그런 느낌이 듭니다.

    ◇ 정관용> 이게 서울고등, 행정법원에서도 판결 내려진 거죠?

    ◆ 손영실>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대법원 가서 뒤바뀔 가능성도 있는 거겠네요?

    ◆ 손영실> 그게 아쉬운 점이요. 1심, 2심에서는 국가가 승소했고 그리고 대법원에 가서 파기환송이 됐습니다. 그런 이유로. 파기환송이 돼서 이번에 지금 11월에 서울고법에 내려와서 비로소 확정이 됐기 때문에 뒤집기는 어려운 것이죠.

    ◇ 정관용> 그렇군요. 파기환송 사건이면 이거는 거의 확정이라고 봐야 되겠네요.

    ◆ 손영실>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이 재판결과가 지금 이미 박탈당한 분들 가운데 소송 제기 안 했던 분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 손영실> 네.

    ◇ 정관용> 그 사람들이 소송을 막 불러일으키고 그 사람들이 소송해서 정부가 더 좀 불리하게 될 가능성으로 작용하기도 하겠네요.

    ◆ 손영실> 네. 그게 재산조사위원회에서 환수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그 결정일로부터 어느 시간이 지나면 소송 제기는 할 수가 없습니다, 행정소송법상으로는. 그런데 이런 판결이 나면 행정소송이 아니라 부동산 소유권 이전 등의 청구라든지 이런 식으로 좀 변형된 형태로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우려는 듭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소송은 더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 거고.

    ◆ 손영실> 네,

    ◇ 정관용> 그리고 이번 판례가 내려졌기 때문에 이건 사실 대법원까지 확정될 것 같은데 이 판례의 영향을 받지 않을까요?

    ◆ 손영실> 아무래도 영향을 미치겠죠. 이게 과거에 어떤 재판이 법의식과 지금의 법의식이 좀 변화가 있었다고 본다면 또 그런 면에서 후손들이 더 용기를 가지고 소송을 제기를 할 수도 있겠죠.

    ◇ 정관용> 그래요. 당시 재산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셨던 분의 입장에서 이번 판결이 대단히 유감일 텐데. 앞으로 어떤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이런 판결이 또 잇따르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 손영실> 법적으로 어떻게 주체를 마련하는 방법이 있겠고요. 그리고 지금 재산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종료를 했기 때문에 이런 소송이 일어났을 때 조금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그런 구심점이 약한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이건 다들 소송 당사자들이 열심히 하셨기는 하지만 구심점이 될 어떤 친일.. 지금 과거사위원회 여러 가지 논의가 있기는 한데, 그런 게 좀 있었으면 하지 않나, 그러면 이런 소송 결과가 안 나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 정관용> 위원회를 좀 상설화시켜서 이런 것에 대응하도록 하는 방법, 이것도 검토해 볼 필요도 있겠고요.

    ◆ 손영실>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법적 근거를 좀더 분명하게 하는 그런 법 개정도 필요하다, 이런 말씀이시군요.

    ◆ 손영실> 네.

    ◇ 정관용> 말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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