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441차 정기 수요시위‘ 에 참석한 정의연 이나영 이사장이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지난 25일 2차 기자회견을 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3)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격앙돼 있었다. 중간중간 기침을 하며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이 할머니는 "먼저 간 할머니들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겠다"고도 했다.
고령인 이 할머니의 폭로는 그만큼 절박했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생존 할머니는 17명뿐.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지난 26일에는 할머니 한분이 안타까운 별세를 하기도 했다.
'피해자 없는 위안부 운동'이 멀지 않았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의기억연대와 전 대표인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당선인을 둘러싼 논란 속에 우리 사회는 '포스트 위안부 운동'을 더욱 절실하게 고민해야 될 상황에 이르렀다.
30년 동안 이어진 '위안부' 운동의 중대 갈림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CBS는 원로 운동가와 학계, 전문가 등을 통해 '위안부' 운동의 과거와 현재(관련 기사-27일자 위안부 운동 30년사(史) '빛과 그림자'는 뭐였나)를 돌아봤다. 이제 향후 과제와 미래를 전망해본다.
◇ 안타까운 기억과 증언자의 시간…'기록과 유산' 절실1991년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수많은 피해자들이 일본의 만행을 알리며 용기있게 나섰다. 그로부터 30년,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하고 피해자 할머니들은 모두 80대 중반 이상의 고령이 됐다. 떨어지는 기력으로 '수요집회'나 운동 현장을 찾기도 힘든 상황이다.
정의연이 서울 마포구에 마련한 '평화의 우리집'에 머무는 길원옥(91) 할머니는 치매로 기억을 하나둘 잃어가고 있다. 세간에 벌어진 논란 속에 할머니들의 시간은 안타깝게만 흘러가고 있다.
국내 위안부 운동은 크게 △위안부 피해 당사자 그룹 △연구자 그룹 △활동가 그룹 등 3축으로 구성돼 있다. 피해 당사자가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일단 시급한 것은 후대에 남길 '기록'과 '유산'이 꼽힌다.
운동을 이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후신인 정의연이 피해자들에 대한 기록 사업을 했지만 범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자료 확보와 연구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위안부 학자는 "정대협이 실태 보고서를 쓰긴 했지만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졌는지 점검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이를 의식해 지난 2018년 여성가족부 산하 기관인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내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연구소의 임무는 위안부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고 연구사업을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인력과 예산 부족의 구조적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초대 소장을 맡은 경북대 김창록 교수는 3개월 만에 물러나는 등 파행을 겪었다.
여가부와 국회 차원에서 '여성인권평화재단' 설립 법안 추진 움직임도 일었다. 법적 근거 없이 기관에 의탁한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이 역시 위안부 관련 사료와 연구 집대성, 공공 외교 등이 목표다. 하지만 20대 국회가 표류하면서 법안은 끝내 통과되지 못했다.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강성현 교수는 "모든 단체와 피해자, 연구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서 재단을 설립하고자 했는데 미래통합당의 반대로 좌절됐다"며 "국가가 해야할 역할, 국가가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재단 설립을 시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민간이 떠맡아 하는 한계를 개선하고자 했다는 얘기다.
기록으로 남겨야 할 추가 연구는 더욱 절실하다.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이신철 소장은 "식민지 청산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 한다"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도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할머니가 훨씬 많다. 최소 2만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 미래세대에 필요한 '교육'…한일 간 교류 이뤄져야
서울 마포구 정의기억연대 사무실(사진=황진환 기자)
기록과 유산을 후대에 어떻게 계승할지는 결국 교육에 달렸다. 이는 이용수 할머니가 절실하게 요구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할머니는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며 올바른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들은 우리 학생들"이라고 강조했다.
한일 간 '위안부' 교육 격차는 여전한 과제다. 일본 정부는 지난 1993년 '고노 담화'를 통해 '위안부'에 대해 사과하고 역사 교육을 하겠다고 했지만, 현재 일본 교과서 다수는 '왜곡'을 담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박근혜 정부 시절 2015년 한일 합의 직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위안부' 표현이 빠져 논란이 일었다.
이신철 소장은 "위안부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일본 학생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라며 "어떻게 교육하고 교류할 것인지 방점이 맞춰져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민족적 교육에만 치중해 있다. 다양한 교육 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대협 초기 공동 설립자이자 원로인 김혜원(85) 선생은 "위안부 운동이 결국은 친일이냐 반일이냐를 넘어서 인류 보편의 평화의 가치를 내세우는 운동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며 "역사, 교육 교과서에도 이런 내용이 반영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김 선생은 "전시관 내지는 교육관을 만들고 세계시민들을 양성해서 이렇게 전쟁 때문에 일어나는 여성의 피해와 인권 유린이 다시는 없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용수 할머니가 요구한 '세계 청소년들이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하고 체험할 수 있는 평화인권교육관을 건립'과 맥을 같이 하는 주장이다.
◇ 정부와 시민사회 '투트랙'…운동의 방향성 고민
이용수(왼쪽) 할머니와 윤미향 당선인(사진=노컷뉴스/연합뉴스)
향후 위안부 운동은 정부와 시민사회 영역의 '투트랙' 호흡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그간 방기했던 역할을, 시민사회 차원에선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된 '피해자 중심주의' 등 운동의 여러 방향성을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강성현 교수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정부 대응이 조금 진행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제도화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정부의 공익법인화, 인적‧자원 지원 등이 제일 중요하다고 보고 민간이나 사회주도성 운동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혜원 선생은 "열악한 상황에 있는 민간단체가 모든 것을 하자니 어떤 점은 미흡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라며 "국가가 잘못해서 나라를 빼앗겼고, 그 식민지 체제 아래서 여성들이 끌려 핍박을 당했다. 이제 국권을 회복했으니 당연히 국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다"라고 지적했다.
최근 들어 더욱 논란이 점화된 '피해자 중심주의'와 관련해선 격론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기금 수령을 정대협에서 막아서면서 갈등이 불거진 것이 하나의 사례로 지목된다. 이밖에 정대협과 정의연에 걸쳐 자신의 운동을 위해 할머니들을 이용했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이용수 할머니는 "30년 동안 이용만 당했다"며 분개했다. 나머지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 지점에 대한 해소는 정의연을 향한 최근 여론 비판을 돌아보게 할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위안부 운동은 전 국민적으로 함께 가야 하기에 따져봐야 할 부분이다.
정대협 양미강 전 사무총장은 "위안부 운동을 피해자만의 운동으로 볼 것인지, 피해자와 더불어 하는 운동으로 볼 것인지 사실 합의가 안 된 것"이라며 "미분화된 상태로 같이 흘러온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 사죄와 보상 문제가 맞물려 돌아간 것이기 때문에, 피해자 중심주의의 의미를 좀더 다각적으로 살펴볼 때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위안부 운동은 결국 우리 사회가 계속 짊어지고 풀어내야 할 숙명에 가깝다. 피해자 없는 위안부 운동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지지는 더욱 중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위해 많은 지탄을 받은 정의연과 윤미향 당선인의 회계 부정 의혹 등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털고 가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용수 할머니는 25일 기자회견에서 "소수 명망가나 외부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정대협과 정의연이 이뤄 온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 국민의 힘으로 새로운 역량을 준비해야 한다"며 "이 운동이 시민들의 지지와 성원으로 성장해 온 만큼 시민의 목소리를 모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한편 지난 18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 이후 종적을 감췄던 윤 당선인은 제21대 국회의원 임기 시작을 하루 앞둔 29일 오후 2시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