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이 7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해군 강감찬함 소속 일병 사망 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해군에서 선임병 등으로부터 구타, 폭언, 집단 따돌림 등을 겪은 병사가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끝내 극단선택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함장 등 간부들이 피해자로부터 가혹행위에 대한 신고를 받는 등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음에도 가·피해자 분리 등 조치를 취하지 않고 사실상 방치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군이 사건 초기 제대로 된 조치만 취했어도 안타까운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군인권센터는 7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6월 18일, 해군 강감찬함에서 선임병 등으로부터 구타, 폭언, 집단따돌림을 겪은 정모 일병이 휴가 중 자택에서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며 "함장, 부장 등 간부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도 피해자 보호, 구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실상 방치했다"고 주장했다.
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어학병으로 해군에 입대해 올해 2월 1일 강감찬함에 배속된 정 일병은 전입 열흘 후 갑자기 2주간의 청원 휴가를 가게 됐다. 정 일병의 아버지가 2월 11일 불의의 사고를 겪어 간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휴가를 나온 정 일병은 병원과 집을 오가며 아버지를 간호했고, 2월 25일 부대에 복귀했다.
하지만 선임병들은 정 일병에게 "꿀 빨고 있다", "신의 자식이다"는 말을 하며 대놓고 따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 일병이 승조원실(내무반)에 들어오면 다른 병사들은 모두 나가는 식이었다.
구타와 폭언도 이어졌다. 전입 후 바로 휴가를 가는 바람에 업무에 미숙했던 정 일병이 갑판병으로 근무하며 실수를 하자, 선임병 2명은 정 일병의 가슴과 머리를 밀쳐 갑판에 넘어뜨렸다. 정 일병이 "제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묻자 이들은 "뒤X버려라"라고 폭언했다. 이후에도 승조원실 내부에서의 갈굼, 폭행, 욕설 등이 이어졌다고 한다.
결국 정 일병은 3월 16일 오후 8시 30분쯤 함장인 방모 대령에게 카카오톡으로 선임병들의 폭행과 폭언 등을 신고했다. 당시 정 일병은 "비밀을 유지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이 7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해군 강감찬함 소속 일병 사망 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신고를 접수한 방 대령은 정 일병을 가해자로 지목된 선임병들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지 않았다. 단순히 승조원실만 이동시키고 보직을 갑판병에서 CPO당번병으로 변경하기만 했다. 보직이 바뀌었지만 같은 배 안에서 생활하는 해군 특성상 정 일병은 가해 선임병들을 계속 마주쳐야만 했다.
일주일 뒤 정 일병은 주임원사 등에게 요청해 공황장애 약 처방을 받았다. 과거에도 공황장애 약을 복용한 경험이 있던 정 일병은 선임병들의 가혹행위 등으로 다시 약 처방이 필요하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후 정 일병은 같은 달 25일 병영생활상담관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면담 다음 날인 오후 11시쯤 정 일병은 자해시도를 했고, 방 대령에게 연락해 구제를 요청했다. 이때 새벽까지 면담을 진행한 방 대령은 정 일병에게 "가해자들을 불러 사과받는 자리를 갖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가해자들과 정 일병은 만나서 대화를 했다고 한다. 후임병인 피해자와 선임병인 가해자를 분리하지도 않고 가해자에 대한 어떤 징계도 없이 한 자리로 불러 사과 자리를 만든 셈이다.
이후 정 일병은 입대 전에는 보이지 않던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날부터 구토와 과호흡 등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났고, 친구들에게 '약이 없으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갈 수 없다', '미쳐가고 있는 중이다' 등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같은 증상도 함장인 방 대령에게 카톡으로 알렸지만, 방 대령은 정 일병을 하선 조치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정 일병은 갑판 청소 중 기절한 채 발견됐지만 30분 휴식만 취한 후 '다시 청소를 하겠다'며 돌아가는 등 '선임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감과 불안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또 하루는 부장인 김모 중령이 정 일병만 식당에 들어가 있게 하고, 함 내 다른 병사들을 모두 집합시키도록 하자 정 일병이 매우 불안해하며 자책했다고 한다.
결국 방 대령은 정 일병을 4월 6일이 되어서야 하선시켜 민간 병원에 위탁진료를 보냈다. 입원해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정 일병은 6월 8일 퇴원했고, 약 한 달간의 휴가를 받았다. 하지만 가족과 친구들에게 '스스로 낙오자가 됐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정 일병은 끝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서욱 국방부 장관(왼쪽)과 부석종 해군참모총이 지난달 20일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모습. 윤창원 기자반면 강감찬함은 4월 1~2일쯤이 되어서야 가해자들에게 경위서를 쓰도록 했다고 한다. 함장이 폭행과 폭언을 인지한 날로부터 보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또 정 일병이 하선한 뒤 가해자들을 징계위원회도 아닌 '군기지도위원회'에 회부했다. 군기 훈련이나 벌점 등을 부여하는 곳으로 폭언과 폭행이 있었지만 수사 없이 사건을 덮은 셈이다.
군인권센터는 "정 일병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명백한 군의 책임이다. 정 일병은 살기 위해 수차례 함장 등 지휘관에게 SOS 요청을 보냈다. 외부에 도움을 청할 법도 하건만 지휘관을 믿고 계속 조치를 요청했던 것"이라며 "그러나 이들은 정 일병을 방치했고, 잡음 없이 사건을 묻고 가기 위해 가해자들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해군 3함대는 함 내 관계자들의 신상을 확보하기는커녕 정 일병 사망으로부터 열흘이 지난 후에도 함장과 부장 등을 인사조치 없이 그대로 청해부대로 보냈다"며 "주요 수사 대상자들은 아직도 제대로 된 조사를 받지 않았다. 진술 오염의 가능성이 우려됨에도 군사경찰은 '배가 돌아오면 조사할 예정'이라는 태평한 소리만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매번 군에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어떻게든 사건을 무마, 은폐해 책임질 사람을 줄여보려는 군의 특성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달마다 같은 패턴으로 장병의 죽음을 대하는 군의 태도를 보며 분노와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며 "해군은 즉시 정 일병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들의 신상을 확보하고, 함장과 부장 등을 소환해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