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농구의 대들보 김주성(사진 왼쪽)이 후배 이종현과 함께 웃고 있다. 김주성은 16년 전 이종현처럼 대표팀의 막내였다 (사진 제공=KBL)
김주성(35·원주 동부)에게 1998년과 2014년은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
국제농구연맹(FIBA)가 주관하는 세계선수권대회(현 농구 월드컵) 무대를 밟았고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했다.
하지만 두 해가 주는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김주성이 처음 태극마크를 단 1998년 당시 그는 대학생이었다. 서장훈, 이상민 등 기라성같은 선배들을 따라다니는 막내였다. 출전 기회도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꿈은 컸던 시절이다. 당시 한국은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대회의 단골손님이었다. 중국이 아시아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한국은 '2인자' 그룹의 선두주자였다.
김주성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런데 그때가 한국 남자농구의 마지막 중흥기가 될 줄은 누구도 예상 못했다. 김주성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농구가 가장 좋았을 때와 안 좋았을 때를 모두 경험했다", 김주성의 말이다.
2002년 이후 김주성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남자농구는 아시아에서조차 변방으로 밀려났다. 중동 국가들이 '오일머니'를 앞세워 외국인선수들을 대거 영입, 한국을 제치고 중국과 경합을 벌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오일머니' 대신 하메드 하다디를 비롯한 순수 황금세대를 앞세워 아시아를 제패한 이란도 등장했다.
이로 인해 한국은 2002년 이후 한동안 올림픽과 농구 월드컵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누구보다 김주성이 느낀 책임감은 컸다.
한국은 작년 필리핀에서 열린 FIBA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3위를 차지해 16년 만의 농구 월드컵 진출 티켓을 땄다. 김주성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김주성에게 2014년 특별하다. 16년 만에 다시 농구 월드컵 무대를 밟았고 아시안게임에도 나섰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은 김주성에게 다섯 번째 아시안게임 출전 대회다.
16년 전과는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1998년에는 승패와 관계없이 희망이 컸다. 지금은 어떻게든 무너진 남자농구를 다시 일으켜세워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 컸다.
남자농구 대표팀은 9월 중순 막을 내린 농구 월드컵에서 5전 전패를 당했다. 세계의 벽은 높았다. 하지만 김주성은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시안게임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3일 오후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대회 남자농구 이란과의 결승전.
79-77로 앞선 채 종료 버저가 울리는 순간 대표팀 선수들은 서로를 부등켜 안고 기쁨을 나눴다. 남자농구가 2002년 부산 대회 이후 12년 만에 다시 아시안게임 정상에 서는 순간이었다.
김주성이 느낀 감정은 남들과는 달랐다. 젊었을 때 느꼈던 감격이 종종 찾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남자농구를 다시 아시아 정상으로이끌기 위해 앞장 서서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했던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