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그냥 이뻐 죽겠어' 넥센 신재영(오른쪽)이 22일 삼성과 홈 경기에서 올 시즌 국내 선수 첫 10승을 달성한 뒤 손혁 투수 코치의 격한 축하를 받는 모습.(자료사진=넥센)
올해 프로야구는 시즌 전 예상이 상당 부분 벗어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승후보들의 순항도 있으나 의외의 부진이 더 충격적으로 대비되는 모양새다.
최근 몇 년 동안 수백억 원을 쏟아부어 우승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던 한화는 최하위로 처져 있고, 2010년대 최강으로 군림하던 삼성 역시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다. 지난해 1군에 합류한 신생팀 케이티와 엇비슷한 성적이다.
무엇보다 올 시즌은 약체로 꼽혔던 넥센의 선전이 눈에 띈다. 넥센은 23일까지 '2016 타이어뱅크 KBO 리그'에서 3위를 달리고 있다. 36승31패1무, 승률 5할3푼7리로 10개 구단 중 3개 팀뿐인 5할 이상 승률을 기록 중이다. A 감독은 "넥센이 전문가들을 우습게 만들고 있다"고 농담을 할 정도다.
물론 승률 7할대(.716)의 1위 두산과 6할대 후반(.672)의 NC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4위 SK(34승35패)와 승차가 3경기로 제법 차이가 난다. 전통의 인기 구단 엘롯기(LG-KIA-롯데)도 내려다 보고 있다.
넥센은 올해 팀 연봉 최하위 구단이다. 총 40억5800만 원으로 한화(102억1000만 원)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이런 넥센의 선전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박병호-강정호 없어도 넥센은 강하다영웅 군단을 이끄는 수장 염경엽 감독은 "1군 엔트리에 오른 27명이 아니라 (오르내리는 선수들까지) 32명 전원이 제 역할을 한 결과"라고 말한다.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던 주축 몇 명이 이끌고 나머지가 보조하는 게 아니라 선수단 전체가 십시일반으로 전력을 이룬다는 것이다. 대타, 대주자, 원포인트 릴리프 등 넥센은 이른바 스페셜리스트의 팀이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넥센 야구는 영화 '어벤져스'처럼 초인집단의 야구였다. 2년 동안 105홈런을 날린 거포 박병호(미네소타)를 비롯해 40홈런-100타점을 때리는 대형 유격수 강정호(피츠버그), 최다안타왕 유한준(케이티) 등 막강 공격력에, 마운드에서는 20승 투수 앤디 밴 헤켄(세이부)이 이끌고 홀드왕 한현희, 조상우가 받치며 세이브왕 손승락(롯데)가 매조지는 구조였다.
하지만 올해 앞서 언급한 MVP급 선수들은 없다. 죄다 해외로, 다른 팀으로 줄줄이 빠져 나갔고, 그렇지 않으면 부상으로 사실상 시즌을 마감했다. 현재 팀에 남은 MVP급 선수는 2014년 수상자 서건창 정도다. 그래서 시즌 전 넥센은 케이티와 함께 최하위를 다툴 것으로 전망됐다.
'홈런만 득점이냐, 달려도 득점이다' 넥센은 거포 박병호, 강정호, 유한준 등의 이탈에도 올해 기동력으로 장타력을 만회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2일 케이티전에서 대주자 요원 박정음이 더그아웃에서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 모습.(자료사진=넥센)
넥센은 그러나 당당히 3위를 달린다. 넥센이 잘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23일 상대였던 삼성 류중일 감독은 "넥센에 국가대표급 선수가 몇 명이 빠져나갔노"라고 반문하면서 "그런데도 3위를 한다는 것은 정말 잘 하고 있는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류 감독이 높게 평가하는 것은 넥센의 기동력이다. 거포들이 빠져나간 만큼 장타력을 발로 메운다는 것. 넥센은 팀 도루 71개로 1위를 달린다. 2위 롯데(58개)와 차이가 상당하다. 성공률도 68.9%로 리그 평균(65.9%)을 상회한다. 도루는 득점권을 가져오는 동시에 상대 투수들을 압박해 타자들에게도 도움을 준다.
척박한 가운데서도 흙 속의 진주를 발굴한 것도 크다. 넥센은 신인왕이 확실시되는 10승 투수 신재영을 얻었다. 2013년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한 신재영은 경찰청 복무 기간 2군에서 착실하게 선발 수업을 쌓았다. 염 감독은 "10개 구단 감독들이 모두 부탁을 했을 텐데 신재영을 중용해준 경찰청 유승안 감독에게 고맙다"고 했다.
희귀병을 앓았던 마무리 김세현의 분전도 빼놓을 수 없다. 김세현은 18세이브로 이현승(두산)과 함께 공동 1위다. 염 감독은 "모든 선수들이 잘 해줬지만 신재영과 김세현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화-삼성-롯데, 부상에 신음하는 강호들그렇다면 넥센의 선전 이유는 100% 자신들이 잘 해서만 이뤄진 것일까. 또 다른 까닭은 없는 것일까.
넥센의 3위 순항은 당연히 다른 팀들의 부진도 한몫을 하고 있다. 물고 물리는 역학 관계인 만큼 상대성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팀들이 지지부진한 어부지리 효과는 분명히 있다.
특히 한화와 삼성, 롯데 등 가을야구 후보로 거론된 팀들이 예상 밖의 부진을 보인 것이 크다. 한화는 넥센에 8.5경기 차 10위에 처져 있고, 삼성이 7경기, 롯데가 5.5경기 차로 뒤져 있다.
올 시즌 전 예상과 달리 부진 속에 하위권에 처져 있는 한화 김성근(왼쪽부터), 삼성 류중일, 롯데 조원우 감독.(자료사진=해당 구단)
한화와 롯데는 지난 시즌 뒤 의욕적으로 대형 선수들을 영입한 팀들이다. 한화는 4년 84억 원에 마무리 정우람을 데려왔고, 에스밀 로저스와 1년 190만 달러(약 22억 원), 거포 윌린 로사리오와 130만 달러(약 15억 원) 등 현역 메이저리거들도 영입했다. 롯데는 4년 각각 60억, 38억 원에 손승락과 윤길현을 데려와 불펜이 두꺼워졌다.
하지만 한화는 뜻밖에도 최하위다. 로저스, 안영명 등 주축 투수들의 줄부상이 이어진 데다 개막 2연전 충격의 연장 패배의 후유증이 오래갔다. 롯데는 지난해 맹활약한 외국 선수들이 주춤한 가운데 송승준 등의 부상으로 마운드가 불안하다. 한화와 롯데는 팀 평균자책점(ERA)이 5.96과 5.65로 밑바닥이다.
삼성도 부상 악령에 시달리고 있다. 외국인 선수 3명이 모두 신음하는 삼성은 팀의 활력소던 지난해 신인왕 구자욱마저 빠져 있다. 불펜 자원 김기태, 정인욱 등이 선발로 나서는 등 돌려막기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SK와 LG도 4, 5위를 달리지만 겨우 가을야구 마지노선에 턱걸이 중이다. 두 팀 모두 승률이 5할을 넘지 못한다. KIA도 하위권을 맴도는 상황. 결국 경쟁을 해줘야 할 팀들이 고만고만하게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형국이 넥센에게는 득이 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아직 시즌은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다. 현재의 순위가 무더운 여름을 지나 후반기에도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염경엽 감독도 "우리는 전력층이 얇기에 언제든 연패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경계하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올 시즌 판도가 이대로 이어질지, 변화의 바람이 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