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CBS 라디오 <김종대의 뉴스업=""> FM 98.1 (18:25~20:00)
■ 진행 : 김종대 (연세대 객원교수)
■ 대담 : 황이라(전 룸메이트), 변주현(용접 해고 노동자)
◇ 김종대>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사랑이 필요하다. 코로나 이후의 어려움을 우리 모두의 관심과 사랑으로 함께 헤쳐나가보려고 만든 시간입니다. 뉴노멀 뉴로맨스. 오늘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한진중공업의 마지막 해고자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정년 안에 복직을 할 수 있는 날이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출연하시는 두 분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야기 나눠봅니다. 먼저 김진숙 지도위원이 2011년 크레인 위로 올라갔을 때 하루도 빠짐없이 식사와 생활용품을 올려보내신 분이 있죠. 김진숙 지도위원의 예전 룸메이트 황이라 씨 어서 오세요.
◆ 황이라> 반갑습니다.
◇ 김종대> 그리고 한 분 더 모셨습니다. 사실 최근에 김진숙 지도위원의 암이 재발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하셨죠. 그 사실이 알려진 날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 해고 노동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현대건설기계 하청업체의 용접공 일을 하시다가 해고되신 27세 변주현 씨입니다. 지난 8월부터 매일같이 농성 중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변주현 씨, 안녕하세요.
◆ 변주현> 네, 안녕하십니까?
◇ 김종대> 두 분 처음 뵙죠? 두 분도 인사하세요.
◆ 황이라>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변주현>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 김종대> 최근에 김진숙 지도위원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많은 분들이 지금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황이라 씨는 계속해서 옆에서 간호해 주시다가 지금 방송하러 나오신 건가요?
◆ 황이라> 네. 제 일도 조금 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 김종대> 김진숙 지도위원 지금 상태는 어떻습니까?
◆ 황이라> 이번 주 월요일에 재발한 부위 암 수술이 좀 있었고요. 다행히 전이는 없다고 들었고 대신에 이제 출근투쟁 하시면서 사실 워낙 체력이 안 좋아진 상태에서 재발을 하다 보니까 회복하는 데 조금 시간이 아무래도 좀 걸릴 것 같습니다.
◇ 김종대> 그렇군요. 목소리는 좋으시던가요?
◆ 황이라> 예전에는 힘이 엄청났었는데 사실 국정감사에 잠깐 출석하셨던 적이 있는데 그때 사람들이 환자 같지 않다. 이런 얘기를 우스갯소리로 했었는데 지금은 조금 힘도 없으시고 좀 그렇습니다.
◇ 김종대> 알겠습니다. 직접 한번 김진숙 지도위원이 뉴스업 청취자들에게 음성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한번 같이 들어보겠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 뉴스업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 한진중공업의 35년 해고 노동자 김진숙입니다. 복직투쟁을 하다가 재발이 돼서 병원에 입원하게 돼서 저도 굉장히 안타깝고요. 수술은 잘됐고 앞으로 방사선 치료나 길고 지난한 치료의 과정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잘 견디고 잘 버텨내겠습니다. 웃으면서 건강하게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김종대> 예전 같지 않으신 목소리입니다마는 그래도 힘있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암이 재발하셨다는 소식은 언제 들으셨죠?
◆ 황이라> 출근투쟁 하시다 워낙 몸이 안 좋으셔서 사실 병원에 가게 돼서 저희가 검사를 좀 급하게 받았고요. 처음 들었을 때는 저도 그렇고 지도위원님도 잘못 들은 줄 알았죠. 그래서 지도위원님은 아무 말을 안 하셨고요. 제가 나중에 이것저것 조금 확인하고 물을 거 묻고 그랬는데 당일날에는 지도위원님도 좀 놀라셨는지 별 말이 없으셨고 그런데 이제 그다음 날 건강 때문에 투쟁을 제대로 마무리를 혹시 못 지을 거 아닐까. 이런 걱정이 조금 있었고 사실 상심이 크셨습니다.
◇ 김종대> 그 와중에서도 현대건설기계, 우리 하청 노동자, 옆에 계신 변주현 씨에게 편지글을 또 쓰셨어요. 어떻게 해서 보낸 편지글이죠?
◆ 황이라> 지도위원님이 변주현 씨 같이 있던 투쟁 현장에 교육을 가셨고 제가 그때 동행을 했었는데 교육 마치고 오시면서 안 그래도 변주현 씨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가니까 젊은 여성 동지가 있더라. 27살인데 자기하고 비슷한 나이에 해고됐고 그리고 또 같은 여성 용접공이었고.
◇ 김종대> 용접공이라는 그 직업도 같고.
◆ 황이라>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런데 평소에 아마 지도위원님 성격 같았으면 그 이후에도 계속 그 싸움을 계속 가셨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몸이 안 좋으시니까 그걸 이제 못 가니까 되게 미안해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때 집회 때 마침 주현 씨한테 편지를 그렇게 쓰셨던 것 같아요.
◇ 김종대> 그렇게 지금 말씀하시는 황이라 씨도 지하철 매표소에서 근무하시다 해고 노동자가 되셔서 그래서 김진숙 지도위원을 처음 만나게 되신 것이죠? 그때가 26살.
◆ 황이라> 그렇죠.
◇ 김종대> 비슷한 시기입니다.
◆ 황이라> 맞습니다.
◇ 김종대> 우리 변주현 씨, 35년 전에 똑같이 김진숙 지도위원도 여성 용접공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 거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용접공 일을 하게 되셨습니까?
◆ 변주현> 고등학교 때는 이제 디자인을 전공을 했었어요.
◇ 김종대> 디자인.
◆ 변주현> 그런데 네일샵에서 일을 하다가 오래 앉아 있는 게 좀 힘들어서 저한테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보던 중에 중공업에 다니는 동생이 있었는데 술값을 너무 잘 내서 동생인데.
◇ 김종대> 술값을 잘 내서.
◆ 변주현> 그래서 어떻게 너는 돈을 그렇게 많이 버냐 이렇게 물으니까 중공업을 다닌다고 그래서 여자도 일할 수 있냐 물으니까 할 수 있대요. 그래서 이제 스물둘 때 중공업 특수선에서 우선 전기일을 먼저 했었어요.
◇ 김종대> 전기일.
◆ 변주현> 전기선을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가 스물여섯에 이제 건설기계 들어와서 굴착기 용접을 시작한 거죠.
◇ 김종대> 사실 원래는 남성들도 참 힘들어하는 일 아닙니까? 용접을 해 보시니까 어떤 일이든가요?
◆ 변주현> 처음에는 굉장히 어려웠어요. 이게 모양도 좀 누가 봐도 좀 삐뚤빼뚤하고.
◇ 김종대> 모양이?
◆ 변주현> 네. 또 그렇고 지저분해 보인다고 해야 되나. 그랬었는데 형님들이 정말 열심히 가르쳐주셨어요.
◇ 김종대> 반듯하고 매끈하게 용접이 되어야 된다 이 뜻입니까?
◆ 변주현> 그렇죠.
◇ 김종대> 되던가요?
◆ 변주현> 지금은 한 1년 정도 하니까 조금 이제 될랑말랑 할 때쯤에 이렇게 돼서.
◇ 김종대> 그게 조금 내 마음에 들게 나온다 이런 느낌이 들 때 기분이 어떠세요?
◆ 변주현> 안 그래도 그런 날이 있었어요.
◇ 김종대> 있었어요?
◆ 변주현> 용접도 보면 자기가 잘되는 날이 있고 안 되는 날이 있는데 한날은 너무 잘된 거예요. 너무 뿌듯해서 제가 그걸 사진도 찍어놨어요.
◇ 김종대> 그러니까 막 잘되려고 하던 터에 해고되신 거네요.
◆ 변주현> 쭉 이어갔어야 되는데 그렇게 돼서.
◇ 김종대> 어쩌다가 해고되신 겁니까?
◆ 변주현> 이제 형님들이랑 친해지면서 이제 시급이 얼마인지 물어봤거든요. 그러니까 너랑 별 차이 안 난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랑 이제 10년이나 차이가 나는데 경력도 많고 기술이 있는데도 별 차이가 없다는 말에 솔직히 믿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급여 받는 날 공수표라고 하죠. 그거를 숫자로 제 눈으로 직접 보니까 정말 그렇더라고요.
◇ 김종대> 근속한 자도 똑같은 시급 내지는 별 차이가 없는.
◆ 변주현> 차이가 별로 없었어요.
◇ 김종대> 그래서요?
◆ 변주현> 그래서 야간 뛰고 주말에 나오고 해야 300만 원을 이제 받을까 말까 했는데 저는 또 여자 혼자라서 야간도 안 시켜주더라고요. 잔업하고 토요일 하고 이러면 겨우 이백. 세금 떼면 이백 받을까 말까 했는데 그런 부담들 때문에 노동조합에 가입을 하게 됐거든요. 그런데 이제 거기서 단체교섭 진행 중에 저희 업체만 이제 폐업 선언을 한 거예요.
◇ 김종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노조를 만든 것이 어쨌든 폐업으로 이어진 해고의 이유가 됐다. 이렇게 말씀을 정리를 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 황이라 선생님, 크레인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서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하셨어요. 그때 음식물도 이렇게 올려보내주시고 여러 가지 필요한 것 같이 함께해 주셨는데 그때 심경은 어떠셨습니까?
◆ 황이라> 그때는 사실 투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사실 저는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일상적인 얘기들을 많이 했어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내려오면 뭐할까, 내려오면 목욕탕에 갈까. 아니면 온천천을 좀 걸어볼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뭐 이런 거 있잖아요.
◇ 김종대> 그렇지만 이런 김진숙 지도위원의 투쟁을 세상에 알리는 일도 누군가는 해야 됐잖아요. 주로 트위터로 하셨다고요?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김진숙 복직 촉구 시민사회 각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12.1 mjkang@yna.co.kr
◆ 황이라> 맞습니다. 그게 그때 지도위원님 정말 이게 기계치시거든요, 지도위원님이. 진짜 그리고 기계치고 뭔가 바뀌는 거에 대해서 적응을 잘 못하셔서 그때 트위터를 조금 해 보시는 게 어떻겠냐. 그리고 이제 스마트폰을 처음으로 올려드렸어요.
◇ 김종대> 그걸 처음 다뤄보신 거예요, 크레인 위에서?
◆ 황이라> 그렇죠. 제가 스마트폰을 사서 위에 줄에 매달아서 올려드렸던. 그런데 지도위원님이 그걸 막 하루 종일 조물딱조물딱 하시더니 그걸 줄에 매달아서 다시 내리시는 거예요. 못 하겠다고.
◇ 김종대> 못 하겠다고.
◆ 황이라> 그래서 안 된다고.
◇ 김종대> 용접은 잘하시는데 스마트폰은 안 되시네.
◆ 황이라> 안 된다고 다시 하시라고. 그래서 다시 줄에 매달아서 올려드렸는데 며칠을 그렇게 하시더니 나중에는 잘하시더라고요.
◇ 김종대> 적응이 됐군요.
◆ 황이라> 네.
◇ 김종대> 그래서 트위터로 막.
◆ 황이라> 지금은 트위터의 달인이시죠.
◇ 김종대> 달인입니까? 아이고, 참.
◆ 황이라> 글자수까지 딱 맞춰가면서 지금은 잘하세요.
◇ 김종대> 엄청난 발전입니다. 그런데 김진숙 씨가 그렇게 투쟁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정년 기간까지도 복직 투쟁을 하셨는데 왜 이렇게 복직이 안 되는 겁니까?
◆ 황이라> 그 질문을 제일 많이 받거든요. 그래서 왜 복직을 안 시킨다고 하냐고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저희도 사실 궁금한데 저희가 볼 때는 어쨌든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도 두 번에 걸쳐서 권고를 했고 부당한 해고고 그러니까 복직을 해라. 그리고 지도위원님하고 같이 해고되셨던 두 분은 이미 2012년도에 복직을 해서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시거든요. 그러니까 저희는 복직을 안 시킬 이유도 없고 그리고 지금은 어쨌든 정년을 얼마 안 남기셨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충분히 도의적으로라도 저는 회사가 조금 책임을 지고 복직을 시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어려운지. 저희가 도리어 좀 회사한테 묻고 싶은 질문이기도 해요.
◇ 김종대> 회사 측에서 납득 있는 설명이 아직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죠. 두 분께 이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먼저 변주현 씨.
◆ 변주현> 저는 김진숙 지도위원님이 35년 동안 어찌 보면 제 나이에서 그렇게 청춘을 바쳐서 지금까지 투쟁을 해 오신 거잖아요. 그 세월이 참 안타깝기도 하면서 편지로 저한테 이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주현 씨, 주현 씨는 그렇게 살지 마, 다른 사람들처럼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사람 만나서 이제 사랑도 해 보고 하라는 이 말씀이 너무 좀 그날 좀 많이 울었었거든요. 눈물도 나면서 좀 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한테는 위로가 되는 말이었어요.
◇ 김종대> 너무 힘드니까 그런 말씀을 하셨네요. 우리 황이라 씨는요?
◆ 황이라> 저는 이제 지도위원님하고 조금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보니까 지도위원님 사실 어떻게 사셨는지를 제가 잘 안다고 사실 자부할 수 있는데. 사실 지도위원님은 저랑 같이 사시는 동안에도 보일러를 안 키셨거든요. 그런데 저는 또 추위를 많이 타세요, 지도위원님도 추위를 많이 타세요. 그런데도 보일러를 안 트니까 겨울에는 자고 일어나면 코가 이렇게 시린 거예요, 얼굴이. 위에 있는 이불을 덮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보일러도 안 키시고 심지어는 불도 안 키세요. 제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부엌에 나가면 부엌에서 불도 안 켜고 귀신처럼 사과를 막 깎고 계세요. 불을 왜 안 키냐고 그러면 너는 밀양의 할머니들이 그렇게 투쟁하는데 갔다 오면서도 그렇게 불이 켜고 싶니? 이렇게 말씀하세요.
◇ 김종대> 그 뜻이군요.
◆ 황이라> 그러니까 사실은 사람이면 다 사적인 공간에서는 편안하고 싶잖아요. 그런데 지도위원님은 그렇게 되게 자기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사셨거든요. 그런 것들이 여러 가지 부채감 특히 이제 한진에서는 또 돌아가신 분이 네 분이나 계시잖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부채감, 미안함들을 늘 가지고 계셨어요. 한날은 제가 또 지하철을 타는데 라디오를 듣다가 최진희 씨의 천상재회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게 나와서 제가 이제 이어폰을 빼서 귀에 꽂아드렸어요, 이렇게. 그런데 지하철 사람이 너무 많은데 거기서 우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당황해서 지하철을 둘이서 같이 그냥 목적지가 아닌데 내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내려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제가 좀 실수했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저희 이제 2009년도에 김주익 지회장이 크레인에서 목을 매서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김주익 지회장이 가장 좋아하던 노래가 천상재회였던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그걸 잘 모르고 그걸 들려드리니까 이제 그 생각이 나시는 거죠. 그러니까 늘 그렇게 마음에 늘 사람이 늘 마음에 품고 살 수는 없는데 그런데 그렇게 늘 마음에 품고 사시니까 어떻게 저 마음으로 저렇게 사시나. 이런 생각을 사실은 하죠. 그래서 이제 그런 것들 보니까 지도위원님이 어쨌든 35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내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마지막 꿈이자 희망인 복직이 되면 그런 35년의 그런 좀 시간들이 좀 본인에게도 그리고 그걸 주변에서 바라봤던 사람들에게도 좀 치유가 또는 위로가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좀 듭니다.
◇ 김종대> 알겠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관련해서는 노래와 관련된 아픔도 많으시겠어요.
◆ 황이라> 제 개인적으로 아픔이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 김종대> 어떤 노래입니까?
◆ 황이라> 제가 한때 응답하라 드라마가 한창 유행일 때 청춘이라는 노래가 좀 유행했던 적이 있어서.
◇ 김종대> 청춘.
◆ 황이라> 네. 언젠간 가겠지 이렇게 시작하는데.
◇ 김종대> 김창완.
◆ 황이라> 그런데 그게 저는 노랫말도 그렇게 좋고 음도 되게 좋아서 제가 한때 그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지도위원님이 한날에는 그 음악을 좀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래도 그냥 듣고 넘겼죠.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노래가 좋아서 제가 핸드폰 컬러링으로도 설정을 한 거예요. 그런데 한날은 지도위원님이 전화가 오시더니 노래 컬러링조차 이걸로 바꿨니라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리시는 거예요.
◇ 김종대> 화가 많이 나셨네요.
◆ 황이라> 그래서 크게 싸웠습니다, 그날. 그런데 나중에 제가 뒤늦게 그 청춘에 지도위원님이 가진 사연을 듣고 되게 미안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지도위원님이 김창완의 청춘이 이제 유행했던 그때 지도위원님이 수배 생활을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늘 도망다니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사람들도 못 만나고 그때 우울증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자기도 뒤늦게 생각해 보니까. 그래서 이제 그때 그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이 그 노래를 들으면 생각이 났던 거예요, 지도위원님은.
◇ 김종대> 그렇군요.
◆ 황이라> 그러니까 저한테 듣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또 그런 사연들을 저한테 일일이 또 얘기할 수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말씀하셨던 거고 뒤늦게 제가 알고 그 노래가 조금 저는 생각이 나네요.
◇ 김종대> 그러니까 그걸 모르고 싸우신 거예요.
◆ 황이라> 그렇죠.
◇ 김종대> 왜 이 좋은 노래 듣지 말라는 거야 이런식으로.
◆ 황이라> 저는 그렇게 생각했죠. 노랫말도 좋은데 왜 그럴까 그렇게 생각했죠.
◇ 김종대> 알겠습니다. 이제 뉴노멀, 뉴로맨스의 우리 코너의 공식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사랑할까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입니다. 먼저 변주현 씨. 우리가 당신의 복직 투쟁을 덜 고달프게 하려면 어떻게 당신을 사랑해야 됩니까?
◆ 변주현> 사람들이 이제 정규직하고 비정규직 이렇게 아예 차별을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세요. 그래서 저 사람들은 왜 저러나. 그러면 비정규직 있으면 그럼 비정규직을 안 하면 된다. 그렇게 말을 쉽게 하시는 부분이 저는 조금 상처가 되더라고요.
◇ 김종대> 그 말이 상처가 되고.
◆ 변주현> 그래서 정규직 되려고 그러느냐 하는 말들이 저는 좀 사람들이 쉽게 말을 안 했으면 좋겠고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좀 이해하고 그렇게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김종대> 알겠습니다. 역시 근본적인 이유는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쪼개서 차별하는 그런 구조가 근원적으로 바뀌는 것.
◆ 변주현> 그렇죠. 그런 시선들과 구조.
◇ 김종대> 알겠습니다. 황이라 씨 이 말 들으면서 어떤 생각 드세요? 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황이라 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변주현 씨(왼쪽)과 황이라 씨. (사진=뉴스업 제작진)
◆ 황이라> 저는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가 어쨌든 해고됐을 때인데 그때 사실 지도위원님이 많은 힘이 돼줬고 사실은 같이 힘이 돼주는 방식은 그냥 같이 있어주는 거였더라고요. 제가 지나고 생각해 보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비 오면 비 온다고 천막에 별일 없냐. 이렇게 물어봐주시고 또 연말이면 연말이다, 때되면 때됐다고 이렇게 안부 물어봐주시고. 그렇게 늘 같이 있어줬어요. 그리고 특히 예를 들면 제가 사사롭게 얘기했던 거 다 듣고 계시다가 제가 저 홍시 맛있어 보인다 이러면 다음 날 홍시를 사들고 오시는 거예요. 그렇게 하시고. 그리고 손편지 같은 것도 자주 써주시고 늘 그렇게 가까이 있어주고 관심 가져주고 좀 그랬던 게 저한테는 힘이 많이 됐었는데. 그래서 저는 지금도 코로나 때문에 일자리를 잃으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분들한테 조금 관심을 좀 많이 가져주고 또 같이 함께해 주고 그러면 되게 힘이 될 것 같아요.
◇ 김종대> 특히 김진숙 지도위원의 이렇게 손편지. 어떤 그 이렇게 전해 주는 말 중에 기억나는 게 있다면?
◆ 황이라> 제 개인적으로요?
◇ 김종대> 하나 소개해 주세요.
◆ 황이라> 편지에 지도위원님이 똥강아지야, 이렇게 쓰시거든요. 저는 그 말이 그렇게 정감 있고 좋더라고요.
◇ 김종대> 그래요?
◆ 황이라> 네. 똥강아지 아프지 말고 화장실 잘 가고 이런 이야기를...
◇ 김종대> 들을 때 어떠세요?
◆ 황이라> 그럴 때 되게 고맙죠. 사실은 그렇게 개인적이고 아주 내밀한 부분까지 그렇게 챙겨주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좋고 편안하고.
◇ 김종대> 그러면 김진숙 씨가 꿈꾸는 세상은 정말 어떤 세상일까요. 왜 이렇게 모든 투쟁 현장 다니고 항상 남을 품고 있고 무언가 바라는 게 있으실 것 같아요.
◆ 황이라> 제가 이거를 한 번도 지도위원님께 질문을 해 본 적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 병원에 이렇게 누워 있으면서 제가 그냥 무심한 듯이 한번 물어봤어요. 지도위원님께. 그랬더니 지도위원님 대답이 노동자들이 따뜻하게 밥 먹고 그리고 웃으면서 출근했다가 집으로 바로 퇴근하는 그런 세상,병원이나 영안실이 아니고. 이렇게 대답을 하시더라고요.
◇ 김종대> 병원이나 입안실이 아니고 밥 먹고 퇴근하는.
◆ 황이라> 그거는 아마 제가 볼 때는 지도위원님이 어쨌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조선소에서 일하셨으니까 그렇게 아침에 아무렇지도 않게 갔다 올게 하고 갔던 아빠가 다치거나 아니면 죽어서 집으로 못 돌아오는 경우를 또 많이 봤잖아요. 그리고 또 어쨌든 노동조합 한다고 거기는 4명이나 사람이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영안실에서 옛날 동료들을 만나고 이제 이런 경험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셨던 거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이 들더라고요.
◇ 김종대> 알겠습니다. 영남대학교에 또 가신 이야기가 있죠? 이 이야기도 많은 사람들 가슴을 아프게 했는데 한번 소개해 주세요.
◆ 황이라> 지도위원님이 제일 처음 암 진단받고 사실 2년 동안 사람을 안 만나셨어요. 그러니까 본인은 그렇게 어쨌든 나름대로 운동도 하시고 열심히 사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암이 걸리고 이런 사실에 되게 힘들어하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항암하시면서 사실은 또 몸도 많이 안 좋기도 했고 머리도 빠지고 막 이러면서 2년 동안 거의 칩거하다시피 투병 생활만 하셨거든요.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지도위원님이 세상 밖으로 나갔던 게 바로 그 영남의료원 박문진 위원장이 있던 곳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날 그냥 혼자서 이렇게 조그마한 부채에다가 박문진 힘내라 이렇게 해서 혼자 무작정 걸으러 나가셨거든요.
◇ 김종대> 영남대의료원의 박문진 위원장을 만나러 가신 건가요.
◆ 황이라> 지금 생각해 보면 지도위원님은 되게 그냥 보통 사람이 볼 때는 참 무모하다 할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그 아픈 몸으로 그것도 혼자서 그 부채 하나 들고 나가서, 겨울이었어요, 그때가. 그렇게 박문진한테 해 줄 게 없어서 자기는 그냥 걷는 것밖에 못하니까 걸으러 나왔다 하고 걸으신 거예요, 그냥.
◇ 김종대> 거리가 꽤 될 텐데요.
◆ 황이라> 그러니까 부산에서 대구까지. 본인은 이제.
◇ 김종대> 거의 뭐 100km.
◆ 황이라> 본인은 한 한 달 잡고 처음에 시작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어쨌든 소식을 듣고 다음 날에는 이제 한진중공업에서 같이 노동조합 활동하시는 분들이 같이 또 결합해 주시고 이러면서 10명이었다가 30명이었다가 50명이었다가 마지막 걷는 날에는 거의 수백 명이 같이 걸으셨거든요. 그래서 그런 걸 보면 참 기적 같은 일을 많이 만드시는 분이다라는 생각이 좀 들기도 하고요.
◇ 김종대> 그렇군요. 잘 이겨내시겠죠?
◆ 황이라> 저는 잘 이겨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 김종대> 알겠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35년 만의 복직을 우리가 같이 응원하면서 또 코로나로 인해서 또 코로나 이전에도 소리소문 없이 해고되신 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다 같이 응원합니다. 이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특별히 응원하는 신청할 노래가 있다고요?
◆ 황이라> 이거는 지도위원님의 신청곡이기도 한데요. 정태춘, 박은옥의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제가 이걸 신청하시길래 이유가 있냐고 물어봤더니 새벽 첫차 타고 출근하고 싶다고.
◇ 김종대> 그렇군요.
◆ 황이라> 네.
◇ 김종대> 알겠습니다. 이 노래는 잠시 후 함께 듣기로 하겠고요. 김진숙 지도위원과 함께해 오면서 풍상을 같이 겪은 황이라 씨. 그리고 2020년의 김진숙, 바로 변주현 씨. 두 분을 만났습니다. 두 분 감사합니다.
◆ 황이라> 고맙습니다.
◆ 변주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