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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간인 학살 추가 사망자 확인' 국군통합병원 확보 작전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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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민간인 학살 추가 사망자 확인' 국군통합병원 확보 작전 진실은?

    편집자 주

    5·18민주화운동이 올해로 42주년을 맞았다. 지난 1980년 5·18 기간에 국가폭력에 의해 사망한 희생자는 167명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5·18 당시 사망한 민간인들이 속속 확인되면서 추가 조사가 진행될수록 민간인 희생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지난 2년 여 년간의 조사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광주CBS는 조사가 진행될수록 피해 규모가 커지고 있는 5·18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연속 기획보도를 마련했다. 10일은 두 번째 순서로 1980년 당시 계엄군이 광주 외곽 지역에서 자행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인 광주국군통합병원 확보 작전에 대해 보도한다.

    [계엄군 만행 속속 드러나는 5·18 민간인 학살 그날의 진실]
    봉쇄 작전과정서 계엄군 시내로 재진입 유일한 작전 '국군광주병원 확보'
    5·18 진상조사위원회, 군 문서 관련자 증언 등 민간인 학살 추가 피해자 확인
    최초 군 기록에는 민간인 3명 사망 1995년 검찰조사에서는 민간인 8명 사망
    '인근 사격장 가매장·민간인 추가 사망자' 有…부상자 505보안부대 끌려가 고문도
    부상자 치료 인도주의적 이유 내세우면서…민간인 학살 무리한 작전 왜?
    계엄군 실질적인 지휘본부 505보안부대 확보설 유력
    조사위, 추가 조사 등 거쳐 오는 6월 중간조사결과보고서 작성 예정

    ▶ 글 싣는 순서
    ①핏빛으로 물들고 고문 소리 진동한 1980년 5월 전남대 캠퍼스의 진실
    ②'5·18 민간인 학살 추가 사망자 확인' 국군통합병원 확보 작전 진실은?
    (계속)

    5·18 당시 광주시민을 강제 연행하는 계엄군들. 5·18기념재단 제공5·18 당시 광주시민을 강제 연행하는 계엄군들. 5·18기념재단 제공

    #1. 집에 있는데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계속 날아든 총알이 내 얼굴에 박혔다. 우리 집을 향해 얼마나 쏘아댔던지 총알이 거실 유리창은 물론이고 장농까지 뚫고 이불에 수없이 박혀 있었다. 밖에 나가기만 하면 죽는 줄만 알고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2. 계엄군들이 인근 주민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거나 사망했다. 내 아들도 그 때 총에 맞아 죽었다.
     
    #3. 군인들에 의해 동생은 총에 왼쪽 가슴을 맞고 쓰러졌다. 근처에 있던 어떤 아주머니도 총알이 귀 부근을 뚫고 지나가는 상처를 입었고, 벽돌공장 기술자 한 사람도 총에 맞아 죽었다.
     
    1980년 5월 22일 오후 5시 50분쯤. 광주 도심 외곽지역으로 평화롭던 서구 화정동 일대에 느닷없이 총소리가 울려 퍼진다.

    육군 20사단 62연대 2대대가 장갑차 3대를 선두로 주변 주택가에 무차별 총질을 한 것인데, 이 총성은 50분 동안 지속됐다. 5·18 당시 화정동 일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이로인해 무고한 시민 8명이 희생된 것으로 그동안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군 문서와 관련자 증언 등을 종합한 결과 희생자가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희생자 가운데 일부는 인근 백일사격장에 가매장됐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5·18 민간인 학살에 대한 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20사단 전투상보. 조시영 기자20사단 전투상보. 조시영 기자
    계엄군이 작성한 문서를 보면 당시 이 민간인 학살 사건을 '광주국군통합병원 확보 작전'이라고 기록됐다. 군 당국은 군인과 민간인 부상자 치료라는 인도주의적 이유로 이 작전을 벌인 것으로 내세웠다.

    희생자는 축소 은폐됐다. 계엄군은 당초 민간인 희생자가 3명이 발생했다고 축소 은폐했는데, 희생자 수는 지난 1995년 검찰조사에서 8명으로 늘었고, 최근 추가 피해자가 확인되는 등 진실규명이 진행되고 있다.

    부상자들의 치료를 위해 무고한 시민들을 사살하면서까지 광주국군통합병원을 확보해야 했다는 계엄군의 주장이 거짓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20사단 전투상보를 제외하고 당시 군 기록 어디에도 부상자를 광주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하는데 위협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특히 5·18 당시 군 부상자들은 대부분 헬기를 이용해 국군광주병원으로 후송했고, 시민들도 국군광주병원을 이용해 일대는 위기감이 감지되지 않았다.
     

    국군광주병원 및 505보안부대 옛터 주변 현황. 5·18기념사업마스터플랜 제공국군광주병원 및 505보안부대 옛터 주변 현황. 5·18기념사업마스터플랜 제공
    앞서 계엄군은 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5월 21일 오후 5시쯤 광주 시내에서 철수했다. 이후에는 시위가 광주 이외의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내에서 철수한 병력을 외곽에 배치하고, 광주 외부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봉쇄 작전과정에서 계엄군이 시내로 재진입한 것은 5월 22일 광주국군통합병원 확보 작전이 유일했다. 그만큼 군 입장에서는 중요 작전으로 손꼽혔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계엄군의 작전이 '광주국군통합병원 확보'라는 이름 하에 실제로는 인근에 있던 계엄군의 실질적 지휘본부인 505보안부대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인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교수는 "보안사가 주도해 광주에서 작전을 주도하고 있고, 신군부의 핵심은 보안사인데, 그러면 505보안부대를 사수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해야 한다"면서 "하지만 대외적인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에 인근에 위치한 광주국군통합병원 확보를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계엄군이 도심에서 철수하는 다급한 과정에서도 5·18 당시 차량의 이동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의 대량 살상 무기인 대화구를 505보안부대 앞에 설치한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최근 화정동 민간인 학살 사건 당시 부상을 당한 이들이 505보안부대로 끌려가 고문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보안부대 앞 대화구 설치를 담은 전교사 5월 22일 작전일지. 조시영 기자보안부대 앞 대화구 설치를 담은 전교사 5월 22일 작전일지. 조시영 기자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국군광주통합병원 사건의 진실'에 대해 추가 조사 등을 거쳐 오는 6월 중간조사결과보고서를 작성할 예정이다.

    5·18 당시 505보안부대에서 65일 동안 구금을 당한 임부덕 씨는 "42년이 지났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이유로 희생을 당했는지 조차 모르는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이 너무도 많다"면서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게 망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도리다.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발포명령자와 암매장 문제 등 산적한 진실 규명 현안 때문에 뒷전에 있었던 민간인 학살 문제, 그 진실의 문이 하나 둘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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