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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현장과 학계의 다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90년대 한국 여자 테니스 간판 박성희(38) 씨는 올 3월부터 대학 강단에 서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스털링대학교에서 스포츠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지난해 7월 한국에 돌아온 그는 올해 국민대 체육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박 교수는 선수시절 4대 메이저대회 16강(복식) 진출 3회, 국가대항전 페드컵 한국선수 최다승(통산 30승14패) 등의 기록을 남겼고, 1995년에는 세계랭킹 57위(단식)까지 올랐다. 그러나 26살이던 2000년 돌연 은퇴한 후 이듬해 이화여대 체육학과에 입학해 학석사 연계과정 5년을 마쳤다.
이른 은퇴가 아쉽지는 않았다.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공부에 흥미가 많고 재밌었어요. 학생선수일 때도 과외를 받으면서 떨어진 진도를 보충했죠. 대학에 적만 두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서 은퇴 후 대학에 들어갔죠."
전공은 스포츠심리학.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대학에서 스포츠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선수시절 궁금했던 것들에 대한 답을 찾았죠. 90년대만 해도 ''심리상담은 나약한 선수가 받는 것''이라는 부정적 시선이 많았는데 지금은 심리적인 부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이 쪽에 투자와 관심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에요. 심리지원을 꾸준히 받으면 더 즐겁게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고, 은퇴 후에는 선수의 입장을 이해하는 준비된 지도자가 될 수 있어요."
박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선수들의 은퇴 결정 과정과 아일랜드 선수지원 프로그램 개발''이다. 4가지 독립된 연구로 구성된 이 논문은 선수의 삶의 균형 및 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연구결과, 우리나라 선수들은 ''운동하면서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너무 많고, 은퇴과정에서 체육회나 협회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논문은 선수들이 운동하는 동안 삶의 균형을 찾고, 은퇴 후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제 마음과 고민이 담겼죠."
최근 국내 엘리트 스포츠는 선수의 수행(경기력) 향상에만 초점을 맞추던 과거와 달리 삶의 균형과 질까지 고려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박 교수는 "운동선수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운동만 하는 사람''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됐다. 선수가 ''운동이 잘 안된다''고 했을 경우, 단지 운동에서 뿐만 아니라 전체 삶 안에서 스트레스 유발요인을 찾고 대처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예전에는 ''운동선수는 운동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나 한쪽만 파면 그것이 잘 안됐을 때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 공부를 하든, 취미생활을 하든 운동하고 남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면 경쟁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푸는 것과 동시에 균형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근래 들어 확산되고 있는 공부하는 운동선수 지원사업은 선수의 복지 향상을 위한 정책이다. 하지만 선수들에게 무조건 ''공부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선수들은 일반학생처럼 입시준비가 아니라 인성교육과 삶의 기술를 가르쳐주는 교육이 필요해요. 이를테면 갑자기 유명세를 탔을 때 언론에 대처하는 방법이라든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을 때 현명하게 극복하는 방법 등을 알려줘야죠. 또 주니어에서 시니어, 국내용 선수에서 국제용 선수로 넘어갈 때 변화과정에서 겪는 것들을 가르쳐주고, 운동하는 친구들로 한정된 교우관계를 넓힐 수 있게 도와줘야 해요."
그러면서 그는 "선수들 스스로 인내심, 노력하는 자세, 정정당당함, 팀워크 등 선수 출신의 장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이 4년 반의 유학생활을 무사히 마친 것도 선수 출신 특유의 승부근성 덕분이라는 설명.
"선수 때 투어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영어공부를 했기 때문에 영어가 일정수준은 됐지만 외국에서 공부하는 건 또 다른 도전이었죠. 유학가서 처음 2년은 영어로 읽고 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억울하고 약이 올라서 더 열심히 했고, 3년째 접어드니까 (영어가)편해졌죠."
박 교수는 공부하는 운동선수가 늘어나려면 지도자와 학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학생선수에게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습관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와 학부모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교육이 필요해요." 그래서 그는 올해 안에 대한테니스 협회(회장 주원홍)의 협조를 얻어 학부모 간담회를 개최하고, 은퇴를 준비하는 선수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할 계획이다.
"선수시절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면 윔블던 대회 우승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해도 은퇴 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점을 알리는 게 목적이에요. 우리나라 선수들은 어릴 적부터 강압적인 운동에 길들여져서 운동을 즐기지 못하는데, 스스로 원하는 목표를 설정해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해요." [BestNocut_R]
마지막으로 그는 체육학과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스포츠심리학 교수로서의 꿈도 밝혔다. "스포츠심리학은 ''행복한 삶, 더 나은 삶''에 초점을 맞추는 실용학문이에요. 꼭 선수가 아니더라도 학생들이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일상생활에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스포츠에 대한 통찰력이 생기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