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세계챔피언이야." 챔피언 벨트를 차고 있는 백인철.
[90년대 문화가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토토가'는 길거리에 다시 90년대 음악이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90년대는 스포츠의 중흥기였습니다. 하이틴 잡지에 가수, 배우, 개그맨 등과 함께 스포츠 스타의 인기 순위가 실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면 90년대 스포츠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90년대 문화가 시작된 1990년 오늘로 돌아가보려 합니다.]
1980년대는 권투의 중흥기였습니다. 마이크 타이슨 같은 걸출한 스타의 영향도 있었지만, 한국도 여러 체급에서 세계챔피언을 보유했습니다. 주말이면 TV에서도 권투를 틀어주는 것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습니다. 이후 이종격투기가 등장하면서 권투를 TV 중계로 보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물론 플로이드 메이웨더(미국)와 매니 파퀴아오(필리핀)의 대결 같은 경우는 권투의 인기와 상관 없이 세기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25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90년 3월31일은 바로 백인철의 WBA 슈퍼미들급 3차 방어전이 열린 날입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도 백인철을 포함해 5명의 세계챔피언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백인철 외 유명우(WBA 주니어플라이급), 문성길(WBC 슈퍼플라이급), 김봉준(WBA 미니플라이급), 이열우(WBA 플라이급)가 챔피언 벨트를 지키고 있었죠. 그만큼 한국 권투의 인기도 최고였습니다.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 백인철은 돌주먹의 상징이었습니다. 26연속 KO승이라는 기록도 남겼습니다. WBA, IBF 슈퍼미들급 챔피언이었던 박종팔의 19연속 KO승을 넘어선 기록이었습니다. 1988년 12월에는 박종팔과 논타이틀매치를 펼쳐 8회 KO승을 거두기도 했죠. 그리고 1989년 5월 풀헨시오 오벨 메히야스(베네수엘라)를 꺾고 챔피언 벨트를 차고, 1~2차 방어전을 승리할 때만 해도 그야말로 무적이었습니다.
백인철의 3차 방어전 상대는 크리스토퍼 티오조(프랑스). 1984년 LA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였습니다.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프랑스 언론에서는 "약체 챔피언"이라고 자극했지만, 백인철은 기자회견에서 "티오조는 아직 아마추어 티를 못 벗었다"면서 승리를 자신했습니다. 3월16일 일찌감치 프랑스 리옹에 도착해 3차 방어전을 준비했고, 응원단으로부터 한국 음식을 공수받으면서 컨디션 조절도 확실히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백인철은 "8~11회 KO 시킬 것"이라면서 후반 공략으로 나섰는데요. 2, 3라운드에서 한 차례씩 다운을 당했고, 5라운드에는 눈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6라운드 종료 20초를 남기고 주심이 경기를 중단하면서 KO패를 당했습니다. 7cm라는 신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던 탓입니다.
백인철이 3차 방어에 성공했다면 맞붙을 예정이었던 토머스 헌즈.
사실 백인철은 원정에 약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전승을 거뒀지만, 3차례 패했던 것이 모두 원정이었습니다. 원정에서의 약세는 한국 권투의 약점이기도 했죠.
결국 백인철은 대전료 35만달러(당시 2억4500만원)와 함께 링을 떠나게 됩니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점은 당시 '패뷸러스 포(fabulous four)' 중 하나였던 토마스 헌즈(미국)와 대결이 무산된 점입니다. 백인철은 3차 방어전에 성공할 경우 1990년 6월 헌즈와 대결하기로 구두 계약이 된 상태였습니다. 대전료만 해도 최소 100만달러(7억원)였습니다. 3차 방어전 패배로 은퇴까지 했으니 모든 것이 날아간 셈이죠.
이후 백인철은 2009년 간경화 진단을 받고 투병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유명우를 비롯한 권투인들이 모금 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